나를 꼭 안아주는 일

by 정용우

지수(智水)의 겨울은 깊어갑니다. 시골집의 작은 방, 손때 묻은 책들이 꽂힌 서가 앞에 앉아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바라봅니다. 노년에 접어들며 제가 배운 가장 큰 지혜는 '새것'을 탐하기보다 '이미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하는 일입니다. 서울에서 이곳 시골 고향으로 이사 오며 수많은 책을 정리하고 남은 이 소박한 서가는, 이제 내 생의 정수(精髓)만을 모아놓은 마음의 지도와도 같습니다.


비록 공간의 한계로 책들이 내 방과 별채, 그리고 창고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자연스러운 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어준 별채의 공간이 손주들의 웃음 섞인 장난감들로 채워지는 것을 보며, 나의 지식에 대한 욕망이 물러난 자리에 생동하는 사랑이 깃드는 법을 배웁니다. 공간을 비우고 나누는 일은 결국 내 안의 집착을 비워내는 수행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저는 내 방 가장 가까운 곳에 꽂아둔 철학자 김진영의 유작 『아침의 피아노』를 꺼내 듭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투명한 영혼으로 써 내려간 그의 문장은 언제나 큰 깨달음을 줍니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모든 시끄러운 일상들이 문 뒤로 물러났다. 눈앞에 오로지 사랑의 대상들만이 남았다. 세상이 사랑의 대상들과 소란하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이 문장을 음미하다 보면,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괴롭혔던 수많은 '소음'이 보입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조바심, 그리고 짧아지는 생에 대한 초조함들. 연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올해도 이룬 것 없이 지나가는구나"라는 회한은 사실 세상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소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철학자가 마주한 것은 대단한 성취나 거창한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랑의 대상들'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곁에 남은 사랑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창가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 서가에 꽂힌 낡은 책들, 별채에서 들려오는 손주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나' 자신입니다.


철학자는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이 말은 포기가 아니라 가장 용기 있는 긍정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해도, 그 모습 그대로의 나를 온 힘을 다해 껴안아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통과해야 할 마지막 의식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대상이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있으며, 무엇보다 이 사랑스러운 삶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아쉬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비워진 그 자리에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물어가는 2025년의 막바지, 당신도 당신 자신을 꼭 안아주었으면 합니다. "애썼다, 참 고맙다, 여전히 너는 아름답다"고 속삭여 주십시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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