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도 있더이다

by 정용우

서울에 사는 동안에는 매일 돈과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버는 만큼 써야 했고, 때로는 벌기도 전에 나가야 할 돈부터 계산해야 했습니다. 그런 삶이 반복되니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정년퇴직하고 고향인 지수로 이사한 뒤, 이런 생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에 공짜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가을이 되면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집니다.


지금 제가 사는 이 시골 마을은 예전의 활기찬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빈집이 점점 늘어납니다. 풀과 나뭇가지가 집을 덮고, 바람과 비를 막아줄 사람 하나 없이 집들은 조금씩 폐허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그 옛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잊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면 어김없이 주렁주렁 감을 매답니다.


감나무를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감은 우리에게 참 귀한 간식이었습니다. 추석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하나둘 입에 넣어볼 수 있었고, 그것조차도 대가족 식구들과 나누면 늘 부족했습니다. 새벽마다 감나무 아래를 돌며 떨어진 감을 먼저 줍기 위해 서두르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감은 기다림의 상징이었고, 달콤한 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감을 따려 하지 않습니다. 감나무가 아무리 많은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아끼거나 반가워하는 손길은 드뭅니다. 아이들은 도시로 떠났고, 남아 있는 어른들도 이제는 감을 딸 체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지런히 거두었을 감들이 이제는 그냥 땅에 떨어져 벌레의 먹이가 되곤 합니다.


그런 감나무 아래를 산책 중에 지나치다가, 저희 부부는 조심스레 감을 몇 개 따옵니다. 물론 집 안에까지 들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울타리 밖으로 넘어온 가지에 달린 감만 손에 담습니다. 그 감들을 채반에 올려두고 며칠이 지나면, 말랑말랑한 홍시로 익어 갑니다. 반투명하게 빛나는 살결 속에 숨어 있는 달콤한 맛은 어린 시절보다도 더 깊고 진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내는 홍시 두 개를 맛있게 먹었다며 웃습니다. 저는 당뇨 때문에 한입만 먹었지만, 그 한입의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혀끝에 머물던 감의 달콤함은 곧 마음의 온기로 바뀌어 가을의 아침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럴 때면 저는 아내에게 말하곤 합니다. “당신, 시집 참 잘 왔다”고. 그러면 아내는 웃으며 다시 홍시 하나를 손에 듭니다. 그 웃음 속에 삶의 감사와 여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짜로 얻은 감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아도 저절로 익는 과일이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공짜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선물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서울에서의 삶은 분명 치열했고, 많은 것을 이루게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시골에서의 삶은 잊고 살았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누군가의 손길 없이도 자연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진짜 ‘풍요’라는 것을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공짜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돈으로 살 수 없고, 욕심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가을 햇살 속에서 익어가는 감처럼, 삶 속에서 저절로 다가오는 선물들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조금 더 천천히 걷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어 그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오늘도 아침 산책길에서 우리는 그런 공짜를 만납니다. 그리고 속으로 소리 없이 외칩니다.

“세상에 공짜도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