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인의 시 「아름다운 관계」는 소나무 한 그루와 그 소나무를 품은 바위의 이야기로, 우리 삶에서 가장 거룩한 관계의 본질을 묻습니다. 이전에는 이끼 한 점도 키울 수 없던, 메마른 불모의 바위. 작은 생명을 허락하지 않던 그 굳고 차가운 바위가 마침내 푸른 소나무를 키워내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시인은 속삭이듯 답합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속에 “돌이 늙어 품이 넓어졌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 한 구절은 늙음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늙음을 퇴화와 상실로만 여깁니다. 육체의 쇠락과 힘의 약화로 이해하지요. 그러나 시인의 눈으로 본 늙음은 전혀 다릅니다. 바위가 늙었다는 것은 스스로의 견고함을 해체하고, 생명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튕겨내기만 했던 풀씨들을 이제는 이끼와 마른 풀들 사이에 품어 안을 만큼, 단단함이 유연함과 포용력으로 변한 것입니다. 늙음은 마음의 지평이 넓어지는 숭고한 과정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운 관계는 이 바위의 안간힘에서 시작됩니다. 솔씨를 품에 안은 바위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이 대목이야말로 생명을 향한 바위의 사랑이자, 희생의 비전입니다. 사랑은 저절로 피어나는 감정이기보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편안함과 견고함을 포기해야 하는 ‘몸을 트는’ 고통스러운 행위임을 바위는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물 한 방울이 아쉬운 바위 위에서, 자신의 굳은 몸을 애써 틀어 빗물을 모으려는 그 안타까운 노력은 곧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바위의 이 놀라운 행위를 아무에게서나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몸의 한편을 열어 타인의 품이 되어주는 거룩한 일은 결코 쉬운 마음으로 동참할 수 없습니다. 오직 고통에 휘둘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어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은 공감과 연민입니다. 힘든 과정을 인내로 겪어내며 자신의 내면이 깎이고 다듬어진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그저 바라보는 것을 넘어 기꺼이 품어줄 품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타인의 작은 싹이 얼마나 절실히 물 한 방울을 원하는지 압니다.
바위는 마침내 소나무를 키워 푸른 그늘을 드리웠고, 새들을 불러 노래하게 했습니다. 솔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는 강물이 흐르는 듯한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시인은 이제 우리에게 묻습니다.
“뒤돌아본다 /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늙음이 마음의 넓이를 키워준다면, 이제 그 넓어진 품을 누구에게 내어줄 것입니까?
아파본 경험을 통해 얻은 이해와 연민을,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작은 풀꽃 하나를 위한 거룩한 공간으로 내어줄 수 있을 때, 우리의 늙음은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실현이 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