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 워킹맘도 이직하고 싶은데요
지금 다니는 회사를 6년 넘게 다녔다. 1년 정도 가진 육아휴직을 제외하면 5년 4개월 정도 되었지만 사회에서 보는 년도로는 6년이다. 처음 회사에 들어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보고, 바로 대선조사 출구조사 TF에 투입되고, 지금은 대통령이 한 차례 또 바뀌었으니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종은 흔히 말하는 조사업계, 리서치 업계로 업무 강도가 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모든 매출이 고객사를 통해서 나오고 그 일들은 대부분 - 제안서 쓰고 설문지 만들고 보고서 쓰고 - 내부 구성원들이 수행해야 돌아가는 일들이니 야근도 많고 때론 새벽 퇴근도 있다. 물론 최근에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가 회사의 신입, 선임 등을 차지하면서 야근 문화가 많이 줄었지만 여튼 사람을 '갈아' 만들어내는 매출임은 틀림 없다.
그러나 특별히 야근이 많아서, 복직하니 아기 키우기 부적절한 환경이어서 회사를 떠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규모 100명 내외임에도 나 이후 육아휴직에 들어간 직원이 5명이나 된다. 표면적으로는 아기 키우기 꽤 괜찮은 회사다) 복직 후 1년 정도 업무를 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건 1)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데 바뀌지 않는 지난한 작업들 2) 그리고 세상에는 재밌게 할 일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업무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떠나게 만든 건 바로 보고서 작업이었다. 어떤 조직이든 보고서가 없는 곳은 없겠지만, 내가 쓰는 보고서는 그야말로 누가 읽는지도 모르는, 전체 보고서의 페이지만 맞추는, 질문 1의 결과는 몇 퍼센트고, 질문 2와 3의 점수는 몇 점이고 - 등이 9할을 차지했다. 아주 솔직히 말해 몇 개의 문장만 예시로 주면 대학생이 조합해서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런 일이 업무 시간을 차지하고, 초과 근무를 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을 5년을 했다.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문장을 모두 여기에 투입하니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나의 문장을 쓸 생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이젠 AI를 시키면 금방할 작업들인데(이미 18~19년도에 논의되었다), 투입 인력의 기본 역량을 키운답시고 윗선에서는 외면하고 있다. 업계는 날로 전문성을 요구하는데, 이런 데 쓰는 시간 때문에 정작 중요한 프로페셔널함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두번째, 아이를 키우면서 전혀 다른 분야가 있다는 걸 여실히 깨닫고 세상을 보는 눈이 더 틔인 것인지, 세상에는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직 한 두달 전부터 오랫동안 생각만 해오던 파이썬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주 어렴풋이 데이터 분석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직은 만만치 않았다. 공부를 하고 싶은데 퇴근 후 집에 오면 아기를 재우다 잠 드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마음이 괴로웠다. 그렇지만 당장 기본욕구 충족이 더 절실했기에 데이터 분석가에 대한 꿈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그러면서 냉정하게 나의 현재를 직시하였다. 구글신이 도와준다지만 클래스 구현도 제대로 못하는 바닥인데, 경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쪽으로 가겠어?
구인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으니 꽤 많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모두 동종업계여서 다 거절했다. 1)번을 또 반복할 게 뻔한데 동종업계는 가기 싫었던 자존심이 있었다. 그러던 4월 7일 난데없이 한 전화를 받았다. 몇 년 전에 꼭 면접을 보았으면 한다는 회사의 차장님이 본부장이 되어 다시 한 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영입 제의를 한 것이다. 동종업계 중 규모가 매우 큰 축에 속하는 회사여서 연봉은 지금보다 거의 1.5배 이상이었고,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을 삼고초려하듯 계속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1주일 후, 이직 면접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기회여도, 결국은 동종업계라도, 면접은 면접이었다. 남은 일주일동안 머릿속으로 여러차례 면접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며 발표 PT를 준비했다. 회사에는 반차를 내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목감기로 목소리가 계속 갈라졌지만 내 예상보다 PT를 더 잘 마치고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다. 위에서 말했듯 조사 업계는 인력이 가장 중요한 자원인데, 몇 가지 질문에서 회사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출근가능하신가요? 네? 한달 이후요? 하 너무 먼데...아 노동법에 따라서요? 그건 쌍방이 협의하면 됩니다."
"경조사랑 회사일이 겹치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일주일 지방 출장 가실 수 있나요?"
면접을 마치고 나오면서, 몇 주 동안 뻐끈했던 기분이 해소되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왜 이직을 하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달까. 앞에서 말한 1), 2)로 인해 현재 회사를 떠나고 싶어졌지만, 내가 진짜 마주쳐야 하는 문제는 앞으로의 선택지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와 가족을 위한 워라밸이 나름 보장되는, 상대적으로 덜 힘든 회사 vs 지금 커리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돈 많이 주는 데 빡센 회사 였고,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스스로 뿐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고 있던 것이었다. 저 위 질문을 맞닥뜨리고 나의 평소 생각을 말로써 구체화하자 오히려 답이 보였다. '지금 내게는 돈보다는 가족이다'. 나 스스로를 납득시킨 뒤에야 내가 진짜 핵심 질문을 놓치고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1), 2)보다 더 높은 차원에 "가족이 우선인 삶"을 지향한다는 걸 깨닫자 옮겨갈 회사를 고르기가 많이 쉬워졌다. 워라밸이 괜찮고, 1) 쓸데 없는 보고서는 줄일 수 있고, 2) 여전히 재밌는게 많은 ENFP 30대 중반 영유아 워킹맘이 재밌게 일할 수 있는 회사.
아 네? 없을 것 같다구요? 그래도 여전히 이직은 하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