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딸이 될수 없고 시어머니는 친엄마가 아니다 - 고부갈등
누구에게나 "엄마"는 늘 애틋하고 눈물겨운 존재일까요? 브런치 연재를 시작하며 전 나의 어린 유년시절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희 엄마는 그리 다정한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고지식하고 성격도 급하고 남아선호사상도 강하고 욕심많은.. 그런 엄마덕에 늘 우등생, 모범생을 고수했던 나의 어린시절.. 1등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고, 반장이 되어도 성취감도 없었고, 상을 받아와도 대면대면.. 다음에 이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난 어쩌나 하는 불안이 더 컸던 유년시절은 그런 엄마의 대찬 "치맛바람"에힘입어 요즘 아이들 말로 왕따까지 당하며 학교폭력으로 번져나가 제 "국민학교"시절은 그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글쎄요....엄마는 6년내내 지극정성일 만큼 저를 서포트 했습니다. 6년내내 반장을 하는 저를 위해 학교의 모든 소풍, 행사에 있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점심시간마다 새 밥을 해서 학교로 도시락을 가져다 주었으며, 학과 공부도 과외선생 못지 않은 열정으로 돌보았으니까요. 책 좋아하는 저는 방방에 책 전집을 가득 두고 제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왜 전 그 환경이 지금까지도 하나도 고맙지 않을까요....오히려 제 기억에 남아 저를 가끔 눈물나게 하고 울리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시골 읍내 하나밖에 없던 극장에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 슈퍼홍길동 이런 어린이 영화가 들어올때면 정말 미어터질거 같은 그 극장 뒷편에서 어린 딸을 무등태워 내내 서서 그 영화를 보여주던 아버지, 아빠 손을 잡고 처음 공룡영화 쥬라기 공원, 왜 나와 함께 그 영화를 보았는지 끝내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아빠가 보고싶었는데 엄마가 집에 없었거나 해서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튼 어린 나는 이해할수 없었던 "마지막 황제, 부의"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사주던 그 달콤한 부라보콘.. 그 향긋한 바닐라 맛이 혀끝을 감쌀때의 행복함이란..엄마 손을 잡고 병원에 가본건 딱 한번 치과에 발치를 하러 갔을때였는데 그때도 엄마는 엄살부리면 안된다고 다짐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처음본 치과는 너무너무 무서웠는데....하지만 아버지는 6학년이나 되서 다 큰 딸을 품에 꼭 안아 궁둥이에 주사를 맞게 해주었었지요. 그때까지 전 침대에 엎어져 주사를 맞는다는걸 상상할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다정하셨던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부모님은 "엄부엄모"였어요. 일년에 열마디도 안하시는 학자인 아버지와 괄괄하고 성격급하고 무서운 엄마 밑에서 자란 "장녀"인 저는 그야말로 "걸어가는 뒷꿈치도 계집아이 같아 어여쁜" 딸로 자라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성격은 양반댁 대감마님 같은 아버지를 닮지못하고 여걸인 엄마를 닮았는데요.. 그래서였는지 성장하는 내내 그리고 지금도 전 외로움과 불안이 많은 성격입니다. 아마 온전히 마음을 주고 받는 애착이 형성되지 못해서 그럴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그랬으면 시집이라도 좀 다감한 사람에게 갔음 좋았을텐데, 남편은 동갑인 나이치곤 "조선왕조 오백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요. 고집도 세고 제 의견을 그다지 경청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내적불행은 고부갈등에서 한층 빛을 발합니다. 고지식한 친정부모님도 모자라 고지식하고 아들 제일 주의인 시어머니와의 사이는 그야말로 불에 기름을 붙인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어린날부터 무언가에 대해 제대로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자라지 못한 나의 내적불행은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의 부당한 대우에 마치 나라를 잃은 독립투사처럼 불타올라 사사건건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내 어린날이 내 마음을 이리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린 신랑은 어린 아내를 도닥일 아량이 넓지 못했고, 어린 아내는 젊고 기세등등한 시어머니가 무서웠고, 젊고 기세등등한 시어머니는 딸을 키워보지 않아 처음인 시어머니 노릇이 서툴렀습니다. 어린 며느리가 다시 엄마가 되고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 대신 아이를 양육해 주시는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더 커졌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빠가 되어 가장이 된 상황이 애달픈 시어머니의 마음 한자락에 "남의 집 어린딸"이 눈에 들어오기엔 아마 시어머니 노릇을 하시는 우리 어머니도 너무 젊으셔서 모르셨을테죠. 그 옛날 어머니도 며느리가 됐을때 누군가에게 배운것을 그대로 알려주실밖엔 방법이 없으셨다는걸 이제는 압니다. 하지만 스물네살짜리 계집아이가 감당하기는 그 서슬이 너무 무서웠어요. 아이를 키움에도 내 목소리를 감히 낼수 없었고, 우리의 생활에도 어머니의 간섭은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옷입는거, 어딜 가는것, 하나하나 한집에 사는 것도 아닌데 일거수 일투족을 눈치봐야 하니 견딜 재간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타고난 천성이 순종적이지 않은데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터라 견딜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오롯이 아들편인 어머니를 둔 남편이 부러웠습니다. 세상 다시 없을 내편이 엄마라는게 눈물겹도록 부러웠습니다. 우리 나라는 딸가진 죄인이라고 사위에게 큰 소리 치는 장모는 잘 없지만 시어머니의 기세는 여전히 친정엄마에 비해 당당합니다. 남의 집 식구 된 딸 편이 사위밖에 없으니 있는거 없는 거 사위에게 다 대접하여 내 딸 기펴게 해주려는 친정과는 입장이 조금 다르죠. 어쨌든 남의 식구가 내집에 들어오는거니 눈치봐야할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요? 저를 비롯 고부갈등이 있는 집을 보면 대부분 딸같은 며느리가 되려는 물색없는 마음과 딸같이 생각한다는 시어머니의 성급한 마음이 만나 서로 지쳐가며 나타납니다. 일단 이 둘은 영원히 "모녀"가 될수 없다는게 제 주관적 생각입니다. 우리는 친 모녀간이나 다름없다는 분들도 물론 계실줄 압니다. 하지만 다름없는것과 원래 그런것과는 다르죠.
이 둘은 원래 남이었고, 남이고, 남일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을 해야해요. 남인것을 인정할때 비로소 거기에서 오는 존중과 배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딸이 없는 시어머니와 친해지고 싶어서 결혼기념일도 챙겨드리고, 함께 뮤지컬도 보러가고, 심지어 목욕탕도 같이 갔어요. 내가 시어머니가 마음에서 좋아지지 않는데, 무언가를 하려고 하니 자꾸 억울하고 분해집니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만큼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서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어머님도 똑같으셨을겁니다. 시어머니 노릇이 처음인 어머님은 어린 며느리에게 나름 한다고 하셨을 겁니다. 산후 바라지도 해주시고, 덜컥 낳아놓은 큰아이 육아도 도맡아 해주셨고, 그렇다고 어린 며느리가 고분고분하지도 않았고, 그러니 얼마나 제가 미우셨을까요.
그런데 이 두사람은 그런 내색없이 서로 바라보며 웃습니다. 속이 속이 아닌채로요....
그럼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해준만큼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분이 되고 억울해지기 시작할 무렵,
그저 욕안먹을 만큼만 기본적인 내 도리만 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 싫은건 싫다고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그 당돌한 행동이 오히려 어머님을 더 화나게 만들었지만, 나는 내가 못하는걸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어머님의 화에도 조금 여유로워질수 있었습니다.
이건 비단 고부갈등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숙한 "yes"는 매몰찬 "NO"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남인 걸 인정하세요.
절대 내 마음 같은 사람은 없어요. 자기 입안의 혀도 맘대로 안되서 가끔은 깨물리는데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어떻게 내 마음과 같을수 있겠어요.
나와 다른 사람이고, 생각과 삶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 내 생각을 강요할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라앉는걸 느끼실 겁니다.
고부간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도 같은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시어머니와 ㅁㅕ느리가 좋은 사이일수는 없겠지만 서로에 대한 인정으로 조금 더 여유로운 관계가 되길 바래 봅니다. 우선 저부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