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눈에만 예뻐요, 당신의 아드님.
올해로 스물한살이 된 아들..
나의 첫 우주, 나의 첫사랑, 세상에서 가장 처음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준 고마운 존재.
모든것이 서툴고 모든것이 생소했던 이상하고 아름다운 육아의 세계에 나를 데려다 준 아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얻은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기묘한 경험.
하지만 이 고귀한 경험 뒤에 아직도 어제 일 처럼 남아 있는 한 마디가 있다.
스물 네살 가을..
그날은 햇살이 참 곱기도 했었다.
어린 부부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병원에 들어섰다. 아이를 낳으러 들어온 병원은 낯설었다.
마주잡은 두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의 태동은 느릿느릿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분만실과 맞닿은 대기실에 누워 환자복을 갈아입고, 배에는 태동과 태아의 심박수를 감지하는 띠가 둘러지고, 제모와 관장이라는 여태 겪어본 일 없는 모든 절차가 끝났다.
대기실은 추웠다. 대기실이 추웠던 건지 내 마음이 추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곳은 추웠다.
조금 있으니 간호사가 와서 유도분만을 준비했고 잠시 후 나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통증과 마주해야했다.
아프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고통과 두려움과 공포가 함께하는 지옥의 콜라보레이션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이는 분만이 콧구멍으로 수박을 낳는 느낌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하늘이 노랗게 보여야 비로소 아기가 나온다고 했고, 어떤 이는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다는데 나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 같다.
알수없는 고통과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이 계속 될 때 언제 왔는지도 모를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만들때는 좋았지?"
사람은 놀랍다.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에서조차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내가 지금 들은 말은 무엇인가.
차라리 환청이었으면 했다.
절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며 내 부른배를 어루만져주고, 감기에 걸려도 약을 먹을수 없는 내게 따뜻한 음식을 해주던 그 분이 한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의사의 호출에 진찰실에 내려갔고, 나와 어머님이 둘이 남아있던 그 전쟁같은 대기실에서 들은 첫마디가 이런 말은 아니었어야 했다.
진땀이 버쩍버쩍 나는 순간 난 눈을 감고 침대시트를 움켜쥐었다.
진통보다 더한 절망.
절로 짐승의 울부짖음같은 소리가 새어나오는 극한의 고통보다 더한 수치.
친정이 멀어서 바로 달려오지 못한 엄마가 이자리에 없는게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들때는 좋았지?
그 말은 어제일처럼 선연하게 남아서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혼전임신이었던 나를 욕되게 한것도 같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나와 남편의 노력을 폄하한 것도 같고, 태어난 생명을 모욕한 것 같기도 했다.
유도분만이 잘 진행되지 않아 결국 제왕절개를 하고 훗배앓이를 하느라 밤새 고통스러운 그 밤도 그 말은 잊혀지지 않았다. 계속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귓전에 맴돌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스물네살의 여자애에게 그녀가 싱긋 웃으며 건넨 그말..
"만들때는 좋았지?"
아이를 품에 안았을때 이를 꼭 깨물고 결심했다.
누구도 그게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너를 욕되게 하지 않겠다.
내가 품에 안은 우주에 어느 누구도 감히 침공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리고 절대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이따금 말했다.
"너희가 사고쳐서~"라고. 한번도 나의 임신은 나에게 남편에게 사고였던 날은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피임을 해도 완벽한 피임은 없으며, 우린 건강한 남자와 여자였으니 임신의 가능성은 늘 열려있었다. 물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아기는 우리를 당황하게 했고, 놀라게 했지만 곧 우린 임신을 인지하고 우리가 해야 할 방안을 모색했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뒤론 결혼이라는 절차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직장을 잡고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물론 그 과정이 모두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고 부모의 당황함과 아픔도 목격해야했고 반대에도 부딪혔지만 우리에게 임신 열달은 이벤트였다.
어느날은 햇살이 어여쁘고, 어떤날은 소나기가 내리고, 어떤날은 태풍이 불었지만 우린 이 시간 후에 무지개가 뜨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랄맞게 싸우고, 어느날은 하하호호,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는 우리의 신혼이 지나갔다.
힘들고 눈물나고 상처받는 그 어떤날도 나에게 남편에게 아이가 "사고"인 날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신혼을 생명에 대한 책임을 졌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린 어렸고, 경제적 여력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직장을 다녀도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수는 없었다.
일단 육아에 대한 도움을 받아야 했고 아주 가끔은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온전한 "독립"이라 할 수 없었고, 온전한 "책임"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큰아이를 키워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녀에게 나를 모욕하거나 함부로 대할 권리를 쥐어준건 아니었을터.
아이가 나를 찾아왔을지도 모를 어느 날이 나는 좋았을까?
무엇이 좋았어야 했던가. 그와의 섹스가 좋았어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도 알수 없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가 좋았던 경험이 전무후무하기에 나는 알 수가 없지만 그 당시를 돌아보자면 그와 커피를 마시던 이대 앞 카페가 좋았고, 아주 추웠던 겨울 온 서울을 걸어다니며 신촌에 다다라서 빨갛게 얼어버린 서로의 얼굴을 만져주던게 좋았다.
주말이면 그가 서울로 올라와 내 원룸을 청소해주고, 나는 퇴근길에 그가 좋아하는 피자를 사서 집에 오는게 좋았다. 그와 지하철을 타고 까르르 웃던 날이 좋았고, 그를 보러 내려간 김천역에서 헤어지는게 아쉬워 월요일날 첫차를 타고 올라와 서울로 출근하는 피곤함이 좋았다.
밤새 통화를 하다 지쳐 잠들었던 그 노곤함이 좋았으며, 그와 나 사이에 생긴 선물같은 생명이 좋았다.
임신을 확인하고 백화점에서 사온 그 작디작은 베네옷을 내 침대위 곰돌이한테 입혀놓은걸 보고 그가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좋았다.
나는 무엇이 좋아야 했던 걸까.
그녀는 내게 무엇이 좋았냐고 물었던 걸까.
내내 내 손 한번 잡아주지 않았던 그녀가 내게 듣고 싶은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산후조리를 참 정성껏 해주었던 그녀가, 매끼 다른 재료로 미역국을 끓여주었던 그녀가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밥을 먹는 나를 보며, 아이를 어르는 나를 보며, 잠을 자는 나를 보며, 어디선가 불쑥 그녀가 말할 것 같았다.
"만들땐 좋았지?"
이혼하고 몇년이나 지난 얼마전 난 이제는 전남편이 된 그에게 이 이야기를 했었다.
담담하게 언젠가 이런일이 있었어 라고 말하듯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황당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내내 대기실에 있었는데 언제 그런말이 오간거냐고 묻는 그에게 당신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때 라고 말하자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내가 사과할께. 그런데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
"만들때 뭐가 좋았는지 뭐가 좋았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
그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고 나도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흔셋이 되도록 알지 못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도 찾을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고운 내 아이와 함께 할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