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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뽕 Feb 04. 2023

1. 딸같은 며느리

남의 집 귀한 자식 입니다.



결혼하고 난 뒤 안 사실이지만 시댁은 제사가 끊이지 않는 종가집이었다. 종가집 맏며느리이자 외며느리이며 막내며느리였던 나는 명절에 들이닥치는 시댁의 친인척을 보며 뭔가 전의를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주말의 한식당 단체손님같은 그들을 보노라니, 무엇을 해야할지 조차 알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와르르 밀려든 인파는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남자들과 아이들은 거실에, 여자들은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동서들이 무언가를 거들지는 않았다.


새며느리인 나를 둘러보며 질부야~ 하고 다정하게 부르긴 했지만 일손이 들어온 부엌에 앉아 그들끼리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며 화기애애할뿐 싱크대에 서서 다리가 퉁퉁 부은 임산부를 거드는 손은 시어머니 뿐이었다.


제사음식을 전날부터 허리가 휘어지게 해도 나는 제사상에 절을 할 수 없었다. 친정에서는 한번도 겪어본일 없는 문화였다.


여자가 제사상에 절을 할 수 없다는 일을 겪어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상당한 문화충격이었는데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댁 조상님이 나를 업어키운것이 아닐진데, 그들의 제수거리를 장만하는건 죄 남의 집 여식들이었고, 제사상에 절도 못하는 여자가 장만한 음식으로 자기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는 아이러니는 뭘까? 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 왜 여자는 제사상에 절을 안해요?"


"여자는 시집와서 한번만 절을 한다. 여자는 죄가 많아 제사상에


  절을 할수 없어"


응??? 근데 죄많은 여자가 한 음식으로 조상을 대접하면, 그게 더 욕된 일이 아닐까? 어째서 죄없는 남자들이 음식을 해서 복된 제수거리로 자신들의 조상을 대접하지 않는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계속될때쯤 제사는 마무리 되었고, 모두들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기위해 둘러앉았다.


상은 두 세군데에 차려졌다. 


남자 어른들이 큰 상을 차지하고 앉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두군데 정도에 나누어 앉았다. 


하지만 어느 남자도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나르거나 수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아직은 남자가 부엌일을 하는게 꺼려지는게 있다고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식구들이 많은데 어느 남자도 부엌일을 거들지 않는다는건 아이러니 했다.


이 시점에 왜 내 남편은 아무것도 거들지 않았나의 의문점을 재기할 만도 한데 남편은 결혼하기 전 어머니 일을 꽤 잘 거들던 딸같은 아들이었다. 아이를 키울때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맞벌이 가정답게 가사일도 잘 도와주던 남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잘 거들던 딸같은 아들이 며느리를 거들어 주는건 어머님이 용납할 수 없었던가 보다.


마치 자신의 아들이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고 일평생 가르쳐온 것 처럼 그녀는 작은 아들이 나를 거들기 위해 부엌에 드는걸 용납하지 않았다.


분란이 계속되니 스물넷의 남편은 거센 엄마의 반발에 눈치도 보였을테고 배가 남산만큼 부른 아내의 눈치도 보였을것이다.


그는 중재를 할게 아니라 어느 편에 서야한다는 판단을 하긴 어린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게 누구의 편도 되지 못해 양쪽의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결과를 낳으리라 그때는 그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어쨌든 나의 노동의 산물들은 그들의 입으로 마구 쓸어담겨졌다.


어른 남자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여자들은 아이를 챙기며 밥을 먹기 바빠보였다.


배가 부른 나는 바닥에 앉아 밥먹기가 불편했고, 퉁퉁 부은 다리는 배에 눌려 잘 접혀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기름냄새를 맡아선지 피곤이 누적되서인지 밥은 서걱서걱 모래 씹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먹는둥 마는둥 할 사이도 없이 이번엔 빈접시들이 밀려들었다.


이 설거지를 다하고 저들이 돌아가야 나도 우리 엄마한테 갈텐데..


하는 생각에 밥을 먹다 말고 씽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얼른 해놓고 엄마에게 가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임산부가 씽크대에 서서 설거지를 해도 그들은 먹던 밥을 계속해서


먹었고, 빈 접시들은 계속 밀려들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좀 주세요!!"


온 손에 거품이 묻은 채 고개를 돌려보니, 중학생쯤 되어보이는 그날 처음보는 한 아이가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옆에 제 엄마도 아빠도 있건만 아니 중학생이면 와서 제손으로 물을 떠마실수도 있건만 어째서 생면부지의 나에게 저런 요구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들은 척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마음이 요동치는 소리 같아서 불편했다.


아까 그 아이가 다시 소리쳤다.


"물 좀 주세요!"


어느 어른도 네가 가서 마셔라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남편이 다가와 말없이 물통을 그 아이에게 가져다 주었다.


남편이 더 미웠다. 어째서 당신이라도 내편이 되어 네가 물 정도는 가져다 마시라고 말해주지 않는지 서운함이 선을 넘는 기분이었다.




그 상을 다치우고도 왜 저들은 갈길을 가지 않는가


자신의 아내들도 친정에 가야할텐데.. 


왜 남편은 앞장서서 어서 가자 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이제 그만 저도 가겠습니다 라고 말할수 없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착한 며느리병을 앓고 있었던 듯 하다.


예쁜 아이가 되고 싶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착한 며느리병.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가족이 되어 그들의 구성원이 된 지금..


어떻게든 이 곳의 소속감을 가지고 싶은 나의 마음이 나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어머님의 동서라고 해도 사촌 동서가 되다보니 워낙 나이차가 나서 나랑 열살정도밖에 차이가 안나는 시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형님, 며느리 보셔서 좋으시지요?"


"그럼, 난 내 며느리가 딸같이 이뻐. 내가 딸이 없잖아"


딸이라... 난 우리집에서 명절에 음식을 해본적이 없는 철부지였다.


스물넷에 결혼을 했으니 학교 다니며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다 시집을 간 차였다. 그때의 나는 모처럼의 연휴에 친구들을 만나고 영화를 보고 늦잠을 자는 철부지였지만, 엄마는 나를 깨우거나 일을 시키기 위해 약속을 취소하라고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음식을 하느라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고, 아빠는 엄마 옆에서 밤을 까주거나 동그랑땡 반죽으로 동그랑땡을 만들어주거나 하며 엄마의 손을 덜어주었다.




내가 그녀의 딸이었다면, 전날 만들어도 만들어도 끝날것 같지 않던 부침개를 몇소쿠리씩 만들고, 기름이 무서워서 계란후라이도 못하던 그 시절에 튀김솥 앞에서 튀김을 튀기며 기름에 손을 데고, 배가 뭉쳐서 괴로워도 누울수 없으며, 다음날 아침 새벽 6시에 다시 와서 점심때까지 서서 일을 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일을 거들던 딸같은 아들이 며느리 있는 부엌에 들어오는 것도 싫은 엄마가 임신한 자신의 딸을 그리 대했을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며느리를 딸같이 생각한다는건 뭔가 건강한 대답같지 않았다. 난 내 부모에게도 애교있고 애살있는 딸이 아니었다.


천성이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편이었던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고 누군가에게 귀애받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 내가 생면부지의 시댁에 딸같이 굴었을 리가 없다.


시댁에 가면 늘 말없는 아이였고 내가 먼저 다가가는 편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랬으리라 생각되었다.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어떻게 해도 남이다.


어머님이 나를 낳지 않았으니 자기 아들보다 나를 더 귀히 여길수 없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를 딸처럼 여겨주지 않으면서 저런 대답이 나온다는건 의아했다.




내 노동의 산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삼삼오오 인파가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나는 짐을 챙겨 엄마에게 갈 준비를 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다... 라는 생각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거실에 나와보니 아버님과 아주버님은 쇼파에 앉아계시고 어머님은 한켠에서 과일을 깍고 계셨다.


"어머니, 저도 이제 갈께요"


"어머 얘, 우리 이제 영화한편 보려고 했는데 넌 가려고?"


그때 스물넷의 나는 확신했던 것 같다.


아, 난 이들에게 평생 가족이 될 수 없겠구나.


나는 이들에게 언제까지나 이방인이겠구나.


마치 섬을 둘러싼 바다에 떠있는 부표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며느리이지 딸일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휴대폰엔 내가 "딸"로 저장되어 있었다.


적어도 내가 산 15년내내 그랬다.


함께 목욕도 가고, 쇼핑도 가고, 공연도 보러 다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어쩌면 내 마음에도 "딸"같이 될 수 있다는 바램이 있었을 것이다.


부디 이 이상한 나라에 온 저를 예뻐해주세요 라는 나의 마음은 딸이 되기 위해 애쓰는 행동을 낳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니었던 딸이 어느날 딸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건강하지 못했던 나의 욕심과 건강하지 않았던 어머님의 바램은 서로에게 실망과 상처만 남겼다.




어떻게 해도 나를 딸로 대해주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늘 주인이 돌아와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바라는 강아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우리 주인이 돌아와 나를 품에 안아주길 기다렸는데 마치 주인이 들어오자마자 귀찮다는듯 나를 발로 쓱 밀고 방으로 들어가버린 등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


딸이 없는 그녀는 나에게 아들과는 경험하지 못한 어떤 일들을 꿈꾸었을테지만 언제나 겉돌며 어우러지려 들지 않는 방어적인 아이가 어여뻤을리 없을터였다.




건강하지 못한 두사람의 바램은 건강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었다.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게 섭섭하고 분하고 화가 났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으니 옷이 어긋나는게 당연했다.




딸같은 며느리, 아들같은 사위는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남이었고, 지금도 남이고 앞으로도 남이다.


그걸 인지하면 애초에 남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남이기에 나와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남이기에 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아이의 친구가 집에 놀러와도 그 아이가 내 아이같진 않듯이, 타인에 대한 인정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지를 가지기엔 나도 남편도 어렸고 어머니도 시어머니가 처음이었으니 어쩔수 없었을테지만 그 씁쓸함은 여전히 남아있다.


고소한 기름냄새가 가득한 부엌에 달그락달그락 그릇소리..


나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축제.. 명절..


나의 고단함, 나의 부당함, 나의 의문이 나 혼자만의 몫이 되어야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딸 같은 며느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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