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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낫현 Jan 04. 2021

잔잔하고 일상적인 사유의 기록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


여행을 사유와 함께한다는 것. 낯선 땅으로 나의 모든 세계를 이동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쌓아 올리는 나만의 사유. 그것들을 한 조각씩 기록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은 여행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낯선 곳에서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내가 반응하는 방법은 그 어떤 타성에도 지배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했고, 여행은 내게 로망이 되었다.


여행 기록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말이 쉽다. 낯선 땅에서는 존재 자체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식사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도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 밤새도록 놀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차 적응으로 일찍 눈이 감긴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일상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는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이 책은 시칠리아에서 마주한 다른 세계를 소소하게 그려낸다. 시칠리아에 가는 순탄치 않은 과정부터 그곳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 기록들은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가 된다.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라서 더 매력적이다. 작은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르며 기록하는 이야기는 편안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p.91)


김영하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젊은 작가 세대를 대표한 소설가이다. 대학원 시절과 제대 직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EBS 세계 테마 기행에 출연해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도 했다.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뉴욕에서 장기 체류했다. [1]​​​ 여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에 익숙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은 나의 로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나는 기록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여행지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이 싫다. 그래도 기록은 안 할 수 없으니 카메라로 마구 찍어댄다. 그러다가 기록하는 것도, 즐기는 것도 모두 충분히 하지 못한다. 나의 두 번째 유럽여행, 이탈리아에서 제대로 된 기록을 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여행지에서 간결하고 솔직한 기록을 해내는 것은 미래의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피렌체 대성당 앞에서 칵테일을 마실 때의 행복, 티본스테이크를 마주했을 때 느낀 희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느낀 향수 같은 것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정돈된 상태로 기록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때 나의 감정과 생각을 잘 기록해두면, 그 시간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 인생에 점을 확실히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그 점은 이어져서 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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