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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낫현 Feb 02. 2021

모르고 꿈꿔야 했던 그 숱한 세월

황정은의 『연년세세(年年歲歲)』

‘대대손손’, ‘대대손손’하고 생각하다가 ‘연년세세’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말이 저한테 무척 좋았습니다.

대대손손은 뭔가 수직 방향으로 작용하는 말 같았는데 연년세세는 수평으로,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금 더 오갈 수 있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대대손손으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미래의 누군가보다는 연년세세로 만날 수 있는 누군가가 훨씬 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했고요.

왜냐하면 연년세세의 세상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이어갈지 선택하기가 좀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했고 ‘연년세세’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 TV창비, 우리가 모두가 기다려온 황정은의 세계, 『연년세세』 낭독 영상 최초 공개! 중

 작가의 말이다. 이 책의 제목 연년세세(年年歲歲)는 작가가 대대손손(代代孫孫)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가 지은 것이다. 대대손손이라는 단어에는 수직적 이미지가 있다. 때에 따라서 폭력적일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보다, 과거를 대물림받는다는 인상이 강하다.


 연년세세는 수평적이다. 시간에 집중한다. 보다 동등한 관계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수평적인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놀라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에, 더 와 닿는지도 모른다.


 대대손손이라는 말은 일상 깊숙이 스며있다. 모두에게는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가려진다. 역할, 의무, 책임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우리의 선택지를 제한한다. 그렇게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원하던 것을 잊는다. 그곳이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곳이다.


 이순일은 전쟁을 겪은 여성이다.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녀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그것 하나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 것이냐는 작가의 물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가부장적인 틀 안에 있는 이순일의 삶은 가족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순일을 이름으로 부른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부르지 않는다.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다. 역할을 떼어낸 한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작가가 바라보는 수평적 삶을 구성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p.73)


 모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영진에게 그렇지 않다. 생명 잉태에 대해 그녀는 두려움, 막연함, 분노를 느끼고 있다. 생명 앞에 여성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지켜봤기 때문일까. 축복이 되어야 할 생명은 그녀에게 고통으로 다가간다.


 생명은 세상 밖에 나오는 순간, 여성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한다. 어떻게 하면 이 짐 없이 생명을 키워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여성은 이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가를 기쁨과 행복 속에서 키울 수 있는 현실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한영진은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그 밥을 먹었고
월급을 받으면 그 상에 월급봉투를
딱 붙이듯 내려놓았다.
그 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과 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 (p.80)


 한영진은 이순일이 차려준 밥상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순일은 한영진이 집에 오기를 기다리다가 매일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을 준비했다. 한영진이 분노한 대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키우느라 이순일이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자식들을 키워야 하는 현실. 그리고 그 굴레를 반복해야 하는 현실이 한영진에게 경멸, 환멸, 분노를 일으켰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없이 버텨야 하는 삶. 그것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말로든 기록으로든 사람은 무언가를 세상에 남길 수 있고, 남기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p.133)

 모든 것을 희생한 이순일은 자신의 삶을 전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이 이야기로라도 자신의 삶을 경험하게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록하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삶이 되어버렸다.


 허망하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식들이 잘 살기를 꿈꿔야 했던 그 숱한 세월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됐다. 슬픈 일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불태워져야 하는 삶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삶.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삶이 모두에게 주어지길 꿈꾼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p.138)


 세월은 이순일이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잘 살기. 평생을 이것 하나만을 바라오며 살았다. 이순일에게 그것은 삶의 굴곡을 견뎌야 할 이유이자, 희생의 이유였을 것이다.


 자신을 불태워 주변을 밝게 하겠다는 생각은 슬픈 것이었다. 이순일이 또 한 번의 삶을 산다면, 자신을 모두 희생하지 않아도 자녀들을 키울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길 바란다. 자신이 무엇을 꿈꾸는 지를 알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냈으면 좋겠다.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언어에 이순일은 없었다.

 김혜진 작가의 책 『딸에 대하여』가 생각났다. 이 책에는 성소수자인 딸이 등장한다. 그녀의 엄마는 딸에 대하여 끔찍이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속박인 말을 내뱉는다.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없고, 어떤 대상의 일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연년세세』에서도 평생을 누군가의 일부로서 살아왔던 이순일이 보였다. 그녀가 경험한 삶의 애환, 두려움, 고통, 희생은 내 나이에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벅찬 것이다. 어느 곳에 속박된 상태에서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자유도 얻어낼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자유로울 때 행복하다. 자유로울 때 아름답다. 일부가 아닌 전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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