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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낫현 Dec 24. 2020

향수가 보여주는 자화상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스포일러가 걱정된다면 완독 후 글을 읽어주세요.


Perfume OST Laura’s Murder PIP모드로 음악을 들으며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향기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누구나 이끌릴 수밖에 없어서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 눈은 감아버리면 되고, 귀는 막으면 되지만, 향기는 호흡하는 한 맡아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그르누이에게 없는 것. 초인적인 후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그르누이는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의 체취는 없다. 세 번째,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는 것. 그르누이는 언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위대한 것, 끔찍한 것 앞에서도 눈을 감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냄새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냄새는 호흡과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형제와 함께 그들 사이에 나타날 때 그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법이다. (p.231)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원하는 악마로 묘사되는 그르누이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거부할 수 없는 것

책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의 섬뜩한 탄생 묘사부터 시작한다. 19세기 프랑스. 악취가 가득한 도시 파리에서 1738년 7월 17일 그르누이가 태어난다. 그의 어머니는 생선 내장과 파리떼가 뒤섞인 생선 좌판대에서 여러 명의 아기를 낳았다. 그르누이도 과거 낳았던 아기들처럼 세상에 나오자마자 세상을 떠날 줄 알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다. 그의 어머니는 출산 후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녀는 영아 살인죄로 광장에서 총살당한다. 비극적이면서도 섬뜩한 탄생 배경을 통해 이 책은 그르누이에게 일반적이지 않은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테리에는 아기의 눈이 자신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코는 달랐다. 갓난아기의 흐릿한 눈이 아직 목표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반면에,
코는 확실하게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p.28)


그르누이는 초인적인 후각 능력을 이용해 갖가지 향기를 만들어낸다. 너무 옅어서 사람들 사이에 은밀하게 숨을 수 있게 하는 향기,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향기, 자신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하는 향기, 고약한 악취를 통해 자신을 피하게 만드는 향기 등.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의 속임수에 넘어간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된다. 대중, 수사당국, 판사들은 이성적인 단서나 근거들을 찾아 범인을 찾아내기보다는 본능에 이끌려 결정을 바꿔버린다. 그 누구도 향기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르누이에게 없는 것

그는 동물들의 가죽을 가공해 파는 곳에서 일하며 고초를 겪는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곳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르누이는 살아남는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엄청난 후각은 갈수록 예민해진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그는 유명한 향수 제조가의 도제로 팔려나간다.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가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가며 향수 제조가는 돈방석 위에 앉게 된다. 쌓여가는 돈이 많아질수록, 더 좋은 향에 대한 그의 집착도 커지고 있었다.


그르누이는 사람을 살해해 채취를 얻으려는 엽기적인 생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여러 명의 소녀가 살해당하고, 마을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르누이는 은밀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소녀들의 채취를 빼앗아 저장한다. 그가 여성들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향기에 대한 괴상한 집착. 그것이 전부였다. 엄청난 후각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만의 체취가 없는 그는 향기를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반드시 사라지는 것

아름다움이 극에 달해 그 누구도 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녀 로르. 그르누이가 이 소녀에 반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향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역시 사랑의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소녀의 향기를 소유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는 그 소녀를 살해해 향기를 훔칠 생각을 한다. 그 소녀는 아무도 모르게 살해당하고, 그르누이는 이내 체포되고 만다.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대중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소리치고, 그르누이는 십자가형을 선고받는다.


형 집행 당일. 그는 마지막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형 집행 당일. 그는 마지막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로르의 채취로 만든 향수를 몸에 뿌리자 그르누이에게 모든 대중이 사랑에 빠진다. 심지어 로르의 아버지까지 그르누이를 용서하고 아들로 삼으려 했으며,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건 이 소설 다운 경악스러운 결말이다. 그르누이의 마지막 순간 조차 향기가 역할을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뿌리고, 길거리에 있던 방랑자들에게 먹히며(말 그대로 진짜 먹힌다.) 생을 마무리한다. 이 모든 일을 벌인 그르누이는 향기의 운명이 그렇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르누이의 이야기를 자화상과 같이 생각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본능에 이끌려 판단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결국 사라져 버릴 것을 소유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르누이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그려졌지만, 누구나 한 조각은 가지고 있는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사형 집행에서 자신을 구한 뒤에도 죽음을 선택하는 그르누이. 그는 어쩌면 허무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향기를 좇아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건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상실감은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도 언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기괴한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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