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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낫현 Dec 28. 2020

감정과 교감이 서 있을 곳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

 *스포일러가 걱정된다면 영화 감상 후 글을 읽어주세요.


Warner Bros. Pictures, Her - Karen O and Spike Jonze “The Moon Song”ㅣPIP모드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읽으실 수 있습니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래. 대부분의 작업은 인공지능이 처리한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작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일상을 이어간다. 2020년 현재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이 세계는 테오도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사람과 교감하며 매 순간 진화하는 OS1.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띈다. OS1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테오도르는 사랑을 잃어가는 한 남자다. 결혼한 아내와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었고, 이혼 직전이다. 그런 테오도르가 OS1에게 첫인사를 건넨다.


사만다와 함께하는 테오도르.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기묘하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이름은 사만다. 테오도르는 그녀와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형성한다. 매 순간 머신러닝을 통해 진화하는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점점 더 깊이 이해한다. 소개받은 여자를 만난 후 느끼는 고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혼란스러움, 이혼 후 찾아오는 고독함과 같은 감정을 오롯이 이해해주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더 의지하게 된다.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진짜 사랑이란 무엇일까. 육체가 없는 운영체제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하며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외로움과 고뇌에 가득한 테오도르.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그에게 관계란 혼란 그 자체다.


테오도르는 '아직 인쇄된 책을 좋아하는 남자'다. 자신이 작성한 편지들을 출판사로 보낸 사만다. 책을 정식으로 출판해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에 진심으로 행복해야 하는 테오도르. 이렇게 아날로그를 아직도 사랑하는 테오도르는 미래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여겨지나 보다. 2020년 한국에는 뉴트로 바람이 불고 있다. 유명 인터넷 쇼핑몰 메인 화면에는 1990년대 유행했던 '카시오 시계'가 등장한다. 한 작곡가는 연예인들과 뉴트로풍의 앨범 합작을 통해 더 큰 유명세를 얻었다. 아날로그는 사람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디지털화가 가속할수록 아날로그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질 것이다.


사만다와 함께하며 행복을 느끼는 테오도르. '어디부터 사랑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한 미래에서도 감성을 생산하는 일은 인간에게 맡겨진다. 뉴스에서 '곧 사라질 직업 100개'와 같은 제목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뉴스의 주제는 보통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인간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를 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기술 속에 살아가는 건 결국 인간이라는 것. '인간적인 것'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고 기술이 흉내내기 어려운 유형의 인간다움은 점점 더 소중한 가치가 될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 기술 속에 살아가는 건 결국 인간이다.
영화는 “육체적인 교감 없는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육체적인 교감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영화는 테오도르를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운영체제와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영화 초반에 테오도르는 거리낌이 없다. 색다른 감정을 느끼며 점점 빠져든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육체적인 교감이 없는 사랑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자신 이외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사만다에게 큰 충격을 받는다. 육체적인 교감을 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자는 사만사의 제안을 승낙하지만, 한계를 깨닫고 절망하기도 한다. 영화는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관계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줬다.


사만다는 곧 테오도르 곁을 떠나간다. 자신의 진화 속도가 점점 빨라져 테오로드와 더 이상 교감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테오도르라는 책을 읽고, 사랑하는데 그 글자 사이가 너무나 멀어져 더 이상 읽을 수 없다고 비유한다. 사만다의 처리속도는 인간과 교감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전해버린 것. 사만사는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설계됐다. 하지만 그 기술이 너무나 앞서간 나머지 주객전도 상황이 찾아오고 말았다. 기술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발전할 것일 텐데, 특이점 이후에 결국 인간을 떠나가는 사만사를 통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미래에 감정과 교감이 서 있을 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미래에도 여전히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있을까. 기술 발전의 흐름 속 많은 것이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대부분의 인간적인 것이 소멸할 것이라는 예상은 지나치다. 인간이 기술을 향유하는 주체인 이상, 인간다움의 가치는 살아남을 것이다. 기술에 둘러싸여 획일적이고 효율적인 사고만을 이어가다가는 진정 중요한 가치를 잊을 수 있다. 고도의 기술 발전 속 감성, 교감,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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