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 느린 늦깎이 PM의 성장 기록
※ 본 글의 초안은 2025년에 작성해 두었지만 바쁨과 귀차니즘을 핑계로 이제야 글을 마무리 지어봅니다 ^^;
작년 11월, 인사 개편과 함께 업무 모듈 조정이 있었습니다.
처음 PM부서로 발령받아 맡았던 업무는 이커머스 사업의 대표 비즈니스 모델 (판매수수료, 직매입, 광고 수수료) 중 하나인 직매입 프로세스 개선과 주문 플랫폼 총괄 운영 및 기획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적응기간을 거쳐 작년 11월부터는 직매입과 함께 방송 플랫폼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데요. (참고로 제가 신규 업무를 배우고자 고군분투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통해 확인 가능하십니다)
참고로 방송 플랫폼이란 홈쇼핑 도메인에서만 볼 수 있는 모듈로 여타의 이커머스와 달리 '라이브 방송'주문 매체를 운영하기 위한 지원 시스템 기획을 의미합니다. MD가 상품을 들여오기 위해 협력사/셀러와 계약체결을 진행하기 위한 전자계약관리 시스템, 해당 협력사/셀러가 판매하는 제품을 방송 전 미리 검수하기 위한 QA (상품검수) 시스템, 일반 지상파와 같이 편성정보를 세팅하고 세팅된 편성정보에 방송할 상품을 등록하도록 하는 편성 시스템, 실제 방송이 끝나고 난 뒤의 실적을 관리하는 편성실적 집계 등 다양한 모듈들이 한데 얽혀 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업무를 발령받은 지도 벌써 9개월, 이제는 제법 업무가 익숙해진 상황에서 제가 맡았던 모듈과 프로젝트들을 회고해 보면 '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PM들에게 요구되는 역량 중 커뮤니케이션은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이 모듈은 유달리 유관부서와의 정책 협의를 함께 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죠.
홈쇼핑은 본래 3 무(배송비, 교환비, 반품비 모두 무료. 단, 방송 상품에 한정) 정책을 펼치는 유통 채널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쿠팡 와우 멤버십이나 컬리 멤버십에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구매 장벽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종의 유인 책에 일환이었죠. 하지만 홈쇼핑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25년 2분기 기준 메인 4사 홈쇼핑 (CJ, 롯데, GS, 현대)은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이 약 12%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TV를 보지 않는 인구가 늘어 홈쇼핑이 망할 것 같다'라는 말이 2000년대부터 줄곧 나온 말이긴 하지만, 이것이 실제 영업이익으로 반영되는 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이런 상황에서 영업이익 개선을 위한 작은 대안 가운데 반품/교환 배송비의 유료화가 제안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PM은 어떤 업무를 담당하게 될까요? 레거시 파악과 모듈별 이슈사항을 파악하는 것이 전부가 됩니다.
먼저 유료 반품/교환비를 전 상품에 도입하게 될 경우 고객들의 거부감이 극에 달하겠죠? 따라서 고객과 기업 모두가 서운해하지 않으면서 영업이익에 +가 될 수 있는 그 수위를 찾기 위해 영업 데이터 분석과 시뮬레이션을 돌려봅니다. 다음으로 고객들에게 변경된 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안내할지, 현재 반품/교환 정책에 대한 안내가 나가고 있는 프런트 페이지들은 무엇이 있는지 파악해 봅니다. 홈쇼핑 특성상 '방송 중인 프로그램'에도 안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범위는 상당히 늘어나게 되죠. 이후 현재 구조상 방송 상품은 반품/교환비가 무료로 세팅되어 있었을 텐데, 이를 무료로 바꾸기 위해선 어드민 화면별로 어떤 부분들을 수정해야 하는지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별도 반품/교환비 결제'와 관련하여 현재 AS-IS 정책을 확인하고 이에 따른 주문 매체별 정책 변경사항을 어떻게 도입할지도 기획/개발 일감을 리스트업 해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PM은 현재 시점의 다양한 레거시들을 파악하는데 8할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게 되고 나머지 2할은 정책 변경에 따른 엣지케이스들을 수립하게 되는데요. 단순한 정책 하나 바꾸는 것이 특정 모듈을 담당하는 PM 혼자만의 생각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철저히 유관부서와의 스케쥴링과 영향도 파악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홈쇼핑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비단 편성/라이브 방송 시스템만 있지 않습니다. 바로 실적 집계와 관련된 내용인데요.
홈쇼핑 기사를 보다 보면 '미리주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방송 전/후의 상품 판매 실적을 특정 방송 프로그램의 실적으로 집계해 주는 것인데요. 방송을 진행하는 홈쇼핑 사에서는 모두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미리주문의 실적을 집계하기 위한 조건'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을까요? MD들의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수렴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1. 일단 1개 협력사를 토대로 방송되는 상품의 경우, 온라인에서 딱 1개 상품코드만 판매하지는 않습니다. 1개 구성, 2개 구성, 3개짜리 세트구성, 5개짜리 세트 구성 중 5개짜리 세트 구성만 방송에서 판매를 하고 온라인에서는 그 이하의 소량 구성도 판매하는 구조이거덩요. 그렇기 때문에 방송되는 상품코드를 기준으로만 미리주문 실적을 잡아준다면, 실적으로 잡히지 않는 상품코드들이 너무 많아요.
2. 또한 상품의 브랜드는 동일하지만 제조사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같은 의류 브랜드이지만 상의는 A업체에서, 하의는 B업체에서 제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제조사/협력사'를 기준으로 실적을 집계를 공통화한다면 역시 유실되는 실적들이 있을 거예요.
3. 마지막으로 온라인에서만 판매되는 전용 상품코드와 방송에서만 판매되는 전용 상품코드의 실적이 함께 집계될 수 있도록 해요. 일반적으로 실적집계 시, 상품의 판매매체 정보가 라이브 방송인 것은 방송실적으로, 그리고 판매매체가 온라인으로 된 것은 온라인 실적으로 집계하지만.. 1번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결국 '같은 브랜드/같은 회사'의 상품이라고 한다면 이걸 꼭 같은 실적으로 집계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러한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PM은 다음과 같은 의사결정을 진행하게 됩니다.
하나, 실적 집계를 담당하는 주관부서인 영업관리/영업기획 부서와 함께 정책 타당성의 검토를 진행
둘, 타당성 검토를 통해 설정된 정책 내용을 바탕으로 이를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실적이 집계될 수 있도록 프로세스의 로직을 구체화함 (EX. 데이터 플로우 차트 작성 등)
※ 단, 만약 기존 정책이 있고 MD들의 요구사항이 추가된 케이스라면 기존의 실적집계 로직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할 것인지 고민
셋, 개발상으로 구현 가능한지를 개발자와의 최종 검토를 통해 로직에서 집계될 수 있도록 함
일부 사례에 국한된 내용일 수 있지만, 이처럼 대기업 PM이 진행하는 업무가 Bottom up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를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명확하게는 Top down 형태 또는 유관부서의 요청을 통해 업무가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6-7할은 차지하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PM을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 CX기획자에서 PM을 전직하며 원대한 꿈을 꾸었던 저조차 기획업무를 오래 했다고 하지만 PM이란 직무에 가지는 환상은 다음과 같았죠.
1. 탑다운 보단, 바텀업 방식으로 업무 하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를 이룰 것이다
2. 협업하는 부서는 많을지언정, 정작 최종의사결정권한은 PM 본인이 가지게 된다
3. 레거시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비즈니스의 임팩트를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획이다.
그러나 짤막하게 일해본 대기업 PM의 현실, 그리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여전히 탑다운 형태로 일하는 경우가 더 많고, 탑다운 형태로 주어지는 일을 다 쳐내기에도 바쁘다 바텀업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발의하기란 매우 쉽지 않다.(이미 야근을 하더라도 전자로 시작된 플젝이 대부분) 따라서 업무 시 내가 왜 일을 맡게 되었는지, 바텀업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면 어떤 배경/데이터를 보며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의 논리구조를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한다.
2. 협업하는 부서도 많지만 이때 PM은 최종 의사결정을 하기보단 중간 업무 내용을 조정하고 이슈사항에 있어서의 방향성에 일부 의견을 덧대는 수준이다. 따라서 PM은 결국엔 각 협업부서의 의견을 모두 반영한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비즈니스 방향성에 걸맞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협업부서들에게 자기 팀의 이해관계만 고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백오피스 PM은 운영효율성과 정책 복잡도 증가로 인한 정책 운영 비용경계를 관점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3. 서비스의 규모가 크고, 이용 고객이 많아 하나의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고객/비즈니스에 끼치는 영향이 큰 기업이라면 레거시만 제대로 파악해도 절반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그 방대한 양의 서비스 정책 내용을 모두 숙지할 수 없지만 최대한 빠르게 이해하고 새롭게 나타난 이슈/새로운 의견/C레벨의 지시사항을 기존 정책에 응용할 수 있는 자만이 '일 잘하는 PM'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태가 다른, 그리고 기업규모가 다른 현업에서 일하시는 PM분들은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무척이나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