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이 습관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
대학시절부터 나는 내 꿈에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내 꿈의 색은 무엇인지, 모양과 태는 어떤지, 촉감과 냄새는 어떨지 찾고 그려내기를 반복한 것이 6년의 세월이었다. 그렇게 6년의 세월 동안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따뜻한 말로 응원과 지지를 하기보단 질타와 우려,
불안과 초조의 심정으로 내 길이 잘못되고 있다고만 다그칠 뿐이었다.
첫 대학시절은 이랬다.
막막했던 수험생 시절을 3년이나 보내고 어렵게 들어간 대학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계였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 MT에서도 동기들과 친해지기란 쉽지 않았고 또래보다 한 두 살 더 많은 애매한
포지션으로 인해 인싸 모드를 장착하면 나이 먹고 나댄다고 들을까 봐 그냥 조용히 지냈다.
소위 OT조 모임이라고 해서 OT모임 때 만들어준 대학교 친구들과 가장 친하게 지낼 것이라고 했지만
그 당시 어리고 어리던 친구들이 모였고 편식으로 친구를 사귀는 동기들이 많아 결국 나는 아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어디에 몸을 기댈 수 있는 소속감을 느낄 단체는 필요했다.
OT조 동기들과 같은 소모임은 들어가기 싫었고, N수생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고학년 선배가 있는 동아리가 내게 필요했다.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교내 주식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술만 먹으러 다니는 OT조 동기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 것 마냥 보란 듯이 잘 살아보겠다며 가장 있어 보이고 늙은 선배들이 있는 그곳으로 말이다.
주식 동아리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꽤나 어렵고 부담 그 자체였다.
동아리가 아닌 회사로 불리며 폐쇄형 펀드를 운영하는 이 동아리는 서로를 주주로, 동아리 회장을 대표로 부르며 정기 주총과 임원진 회의를 열었고 입단 첫 학기에는 인턴사원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특정 섹터에 배정되어 팀장들의 거시/미시 경제, 간략한 주식 교육을 받고 학기말 공포의 주식 세미나를 한다. 생전 처음 그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동아리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고, 며칠 밤을 선배와 동기들끼리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동기 중 한 명과 갈등이 커져 동아리 탈퇴를 결심하기도 했지만 본래 타고난 소명의식으로 가까스로 이겨내며 무사히 세미나를 마쳤다. 그리고 그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펑펑 울어 동아리 내에선 '아름다운 청년'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이것이 1학년 1학기의 일이었다.
자신감이 붙었던 나는 의중에도 없던 경영학과에 들어와 교내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직무 탐구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그리고 나는 무척이나 있어 보이는 직업, 명예와 사회적 영향력에 근거하여 선택과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많은 공모전과 왜 그렇게 많은 인턴과 왜 그렇게 많은 대외 활동을 했는지 의문스럽다. 영화 연가시의 물을 미친 듯이 찾는 사람처럼 나는 성과와 목표, 포상과 대외적 성과에 무척이나 목이 말라했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고 빨리 직무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30살이 넘은 지금에서 보면 어차피 평생 할 일인데 뭐 그렇게 빨리 달렸나 싶기도 한다.
그렇게 달렸던 이유는 하나, 부모님의 부정이었다.
4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학비 한 번 부탁드리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그때뿐이었다. 나중엔 당연시 여겼다.
그들을 만족시키고 효자가 되고 싶어 다른 결과물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역시나 성과들을 가지고 온 그 순간만 만족스러웠을 뿐 부모님은 늘 언제나 '그런 잔챙이 체력 고갈되는 일을 하지 말고 큰 사업하기 위한 공부에 매진하라'라는 조언이 첫 번째였다. 그 말에 답해드리고자 3번의 창업 시도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어떻게 창업 시도를 하고 무슨 성과를 얻었는지 묻지도 관심도 없다. 결과는 실패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번아웃이 왔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말이다.
여태껏 끊임없이 스스로 다그쳐 달려왔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내가 잘했다거나 잘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목표를 정해놓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스펙을 쌓기 위함도 아니었다. 난 그저 그 행위 자체가 즐거웠고 과정 자체가 내겐 잊을 수 없는 삶의 흔적이자 역사였다.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프로젝트라 말할 정도로 일에 미쳐있었고 워라밸이 아닌 워워밸 (work and work balance)을 따졌다. 하지만 안아주지 않는 부모님 덕에, 괜찮다고, 장하다고, 망해도 좋고 잘되도 좋으니 우리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어 목적과 과정이 혼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5년 바닥을 칠 만큼 슬럼프가 왔다. 몸에는 하나둘씩 병이 생기고 하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 기억으론 2015년 2학기였다. 공모전은 2개, 계약직 인턴 1개, 정규 학기 16학점 이수, 근로 알바 1개. 공모전 2개 전원 입상, 계약직 인턴 오퍼 제안, 정규학기 평점 4.3점, 근로 알바 수료. 성과는 충분했고 재정적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그런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자학이 만들어 낸 내 안의 상처가 곪아 터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려 했지만
이미 터질 대로 터진 후였다. 부모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가 어떤 심리적 굴곡을 거쳐왔는지 모른다.
나쁜 것은 원체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라 속으로 감내하는 것이 연속인 날이었다. 어느 순간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수동적인 쉼이 내 삶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다녔다. 심리학 서적과 종교 서적을 읽었고 고전을 읽으며 근원적 삶의 철학과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결국 나 스스로를 응원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첫 번째는 필사와 일기였다.
개인적으로 글은 내게 배설 행위다. 감정의 응어리진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 적어내는 행위 만으로도 스트레스 완화에 큰 도움이 된다. SNS에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다이어리를 사서 생각날 때마다 적었다. 적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워두지 않았다. 적고 싶은 글귀를 적었고, 잡지를 보며 사고 싶은 물건과 가야 하는 맛집들, 어느 책에 나온 명쾌한 인사이트를 적기도 했다. 잠자기 전과 기상 후 그 노트를 되뇌거나 써내려 가면서 감정의 호흡과 결을 조정하는 법을 배웠다. 이때 비로소 정확히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늘 언제나 '그래, 나는 생각보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글을 썼다. 반성할 것이 있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적절히 매질해가면서도 이전처럼 자학하지 않았다. 죽어 마땅한 나라는 자아의 일부를 지우개로 지워나갔다. 새로운 나를 채워나가기 위해.
두 번째는 봉사였다.
내가 선택한 봉사는 멘토링이었다. 2015년 겨울 방학 때 했던 삼성 드림클래스는 내게 큰 변곡점을 만들어주었다. 도서지역의 중학생 친구들에게 3주간 먹고 자며 영어 교육을 담당했던 나는 아직도 가르쳤던 학생들이 기억에 남는다. 남학생 10명의 담임선생. 사춘기 남학생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했지만 순수하고 말 잘 듣고, 나의 가르침 덕에 자신감과 성적이 나아지는 것을 보며 내가 다 치유를 받았다. 봉사하면 내가 도움받는다라는 상투적인 말이 현실이구나를 깨달았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현재와 과거의 나와 대면했다. 화려함에 치우쳐 우울해하던 나, 친구들과 정말 재밌게 놀았던 중학생 때의 나, 성공의 목적을 잘 사는 것 (wealth)에 만 두었던 나. 그렇게 나라는 다면체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아이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마치 심리치료 상담을 받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나는 취업 준비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에게 멘토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마치 인생 몇십 년 산 사람처럼 네가 뭘 그렇게 안다고 떠들어 대냐고.
그깟 CS서비스 기획 하나 하면서 모든 직무를 아는 것 마냥, 직급이라도 높으면 모르는데 뭐 그리 대단한
인사이트가 있다고 취업 준비생들에게 '젠체'하냐고.
그래서 나는 말한다. 나는 내 자아의 생김새와 내 욕망의 생김새, 그리고 내가 바라는 행복의 생김새를 잘 안다고. 그 생김새는 하나 같이 관종처럼 굴고 싶고 있어 보이고 싶어서 어떤 것을 하기엔 이제 많이 지치고 에너지를 쏟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난 그저 내가 겪어왔던 것들을 나누고,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찾고 조사하고 물어봐서라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게 내 행복이자 내가 사는 이유라는 것을 잘 안다고 말이다.
어느 누군가가 나의 과거와 현재처럼 지지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 딱 한 명이 그걸 알아주고 지원해준다면, 난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뀐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멘토링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그렇다면 부모님은 바뀌셨을까? 아니. 사람은 늘 그렇듯 안 바뀐다.
여전히 내 회사생활에 불만이 있으시고 왜 빨리 자기 사업할 사업거리를 구상하지 않냐며 불만이 있으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잘 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속도를 가진 사람인지도 잘 안다. 어차피 나란 태생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마냥 일상을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속 가능성'을 1순위로 고려한다는 것. 오래 살 생각도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엔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이 전제된 시련을 즐기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오랫동안 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터득한 스스로를 응원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