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묻지 못할 이야기들-
이 두 번째 물음의 물꼬를 트기 위한 생각과 생각을 거듭하다가
나는 실로 똘끼 넘치는 이상한(?) 짓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바로...
학교생활기록부 보관기간이 50년간 이라는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아빠의 생활기록부는 곧 폐기처분이 될지도 모르는 시기.
시간이 별로 없다. 나는 약간의 편법을 동원해 아빠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떼어보기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워낙 오래된 기록이고 졸업 연도 조차 확실치 않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사실은 심리적인 기다림의 시간이 더욱더 길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기분은 참으로 묘하고 묘했다.
딸이 아버지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떼어 본다는 것도 묘한 감정이 들었고 또 그 안에 들어 있을 아빠 자신도 모를 아빠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면서도 묘하게 떨렸다.
뭔가 천기누설을 곧 알게 되는데 기다리는 기분이랄까.
두근 두근 아빠의 소년 시절이 담긴 소중한 종이를 가슴팍에 받아 들고는 냅다 집으로 뛰어 달려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하고 이상한 감정.
낡고 낯선 표기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한자 한자 정성스레 수기로 적혀 내려가 있는 생활기록부는 정말 생소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시대의 생활기록부는 이런 모습이구나.
당당히 엄마, 아빠의 생활기록부를 떼 가지고 온 나를 보며 아빠는 놀랐고 엄마는 경악했다.
당시 살던 곳과 가족관계, 가정환경부터해서 출석상황, 신체 발달수치, 아이큐, 성적 등등. 무엇보다 눈에 들어 오던 것은 역시 수기로 써 내려간 선생님의 코멘트들.
아니, 그 시절 선생님들은 왜 이렇게 쿨하신 것인지 꽤나 적나라한 돌직구 코멘트에 재밌기도 했지만 다소 당황했다. 사실 나보다 당황한 것은 아빠와 엄마이겠지만.
내가 일으킨 사건(??) 덕분에 우리 집은 모처럼 이야기꽃이 피며 화기애애(??)해졌는데 이미 다 봤는데 성적을 가리느라 빼앗는 엄마 아빠가 소년 소녀처럼 귀여워 보였다.
나는 아빠의 결석일수가 높은 것을 질타(??)하며 놀리듯이 물어보기도 하고 국민학교 다닐 때 아빠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당시 같은 반 동급생이야기, 이러한 정직하고 살벌한 수기 기록 코멘트를 남기신 담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등등을 물어보았다.
"그때 아빠는 건강이 좋지 못했어. 툭하면 쓰러지기도 했는데 그걸 철없는 아이들은 입에 거름망도 달지 않고 놀려대고 그러면 학교가 가기 싫어졌지. 그렇게 학교를 며칠을 빠지면 나중에 수업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또 학교가 싫어졌고. 공부가 하기 싫어졌지"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가 대책 없이 당했다. 마음이 쿵! 이내 내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기의 대가이기 때문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아빠가 아팠던 것은 아빠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아빠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서운했던 것만 생각하고 때로는 원망했던 이기적인 딸.
'소년 우리 아빠는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구나' 처음으로 아빠가 내 아빠가 아닌 사람대 사람의 한 남자로서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절 등록금을 못 내고 밥을 굶고 동네엔 거지가 한 가득 이란 얘기는 그저 드라마에서만 보던 이야기 었는데 그것을 내가 현재에서 항상 보고 있는 아빠가 겪은 일이라고 하니 아빠가 생소하게 보이고 역사 속의 정말 옛날 사람처럼 느껴졌다.
70명이 넘는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교실에서 고무신 신고 때 구정이 질질 흘렀던 어린이들이 상상되었다.
처음으로 정말 오랫동안 아빠와 엄마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원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모험을 한 거였는데 다행히 판도라가 상자가 아니라 추억 속으로 타임슬립 하게 했던 마법의 상자가 되어 준 생활기록부에 감사하다.
덧붙이는 글 : 우리 엄마는 어릴 적 사진을 단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가난하고 어린 시절 사진도 많이 찍지 못했고 그나마 있던 것도 이사를 많이 다니다가 잃어버렸대요.
아빠 것을 떼면서 함께 떼었는데 사실 엄마의 생활기록부를 떼어 보려던 건 순전히 생활기록부에는 엄마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는 소망과 설렘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사진은 없더라고요.
저는 아직도 엄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궁금해요. 그녀의 어린 시절이.
부모 잘 만나서 밥 꼬박 먹고 준비물 제때 챙겨가고 게다가 대학까지 다니게 주신 부모님에게 문득 가슴 깊이 감사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으며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그 평범함을 위해 평범함을 뛰어넘는 뼛속 깊은 피와 땀 희생되었다는 것을
어설프게 착하고 어설프게 철든, 사실 그래서 더 나쁜 딸은 오늘도 뒤늦게 철드는 중이다.
대화의 물꼬를 가져다 주었던 아빠의 생활기록부(아바 마마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흐림 처리)
우리처럼 똑같이 돌봄이 필요했고 불완전하고 어렸던 그들의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