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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Oct 30. 2022

언젠간 잘리고, 언젠간 죽는다

마흔, 반환점을 돌면 해야 할 일

김정기 화백이 죽었다.


개인적으로 진짜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스티브 잡스를 보면서도, 스티븐 호킹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경탄을 이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내뱉었다. 머릿속에 우주를 넣어놓기라도 한 듯, 일필휘지로 온갖 만물을 턱턱 그려내는 드로잉쇼를 볼 때면 그만 넋을 잃고 말았으니까. 어쩌면 만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재능이 턱없이 부족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내 과거가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갑자기 죽었다. 가을로 들어서던 10월의 초입 어느 날, 드로잉쇼를 위해 출국차 찾은 파리 공항에서 몸에 이상 기운을 느껴 응급실로 향했지만 손도 못써보고 세상을 떴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급성심근경색'이라 했다. 인간의 죽음에 허망하지 않은 것이 어디있겠는가만은 75년생, 예술혼을 불태우던 천재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멀리 한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76년생 누군가의 의식을 잠시간 붙들었다. 그의 천재적 재능이 아까워서였을까? 아니면 '75년생', 나와는 고작 1년 차이인 48세의 나이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이런 일이 또 있었지 싶다. [자포스] 성공신화를 읽고 창업자인 토니 셰이에게 푹 빠졌던 그다음 날 느닷없이 날아온 그의 사망 소식에 하루 종일 멍했던 기억. 토니 셰이 역시 미국 스타트업계에 '대체 불가의 젊은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콜센터를 자사의 핵심 자산으로 탈바꿈시키며 자포스 열풍을 만들어낸 신화적 주인공 아니던가. 전도유망했던 그는 도시 재생사업에 열정을 보이던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새삼, 정해진 수순이지만 마치 자기 일은 아닌 것처럼 여기는 절대 진리를 되새긴다. 죽음 앞에서는 참으로 공평하지 뭔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건, 평생 써도 다 못쓸 재력이 있건, 기껏 100년 정도의 시간만을 허락할 뿐이니 말이다. 


타인의 비극을 계기로 자신을 추스르는 일이 온당한가 싶기도 하지만, 백 년도 못살면서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되었다면 그 또한 의미는 있으리라. 아직 오지도 않은, 아니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걱정해 오늘을 미루지 않겠다는 다짐 역시 귀하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명제만큼이나 직장인들에 예외 없는 또 하나의 진리는 '언젠가는 잘린다'는 사실이다. 무수한 현대 직장인들이 그저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양 살아가지만, 그래 봤자 50대 중반 60대 초반이 한계다. 천운을 타 임원이 되고 사장이 되어도 언젠간 반드시 잘리게 되어 있다. 

기대 수명이 80년 이상인 시대에 5~60대에 세상에 나오게 되면 수십 년은 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자신을 죽이고 머리를 조아리고 열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비위를 맞추며 살아도 그 과정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반쪽 짜리다. 누군가의 입안에 혀처럼 굴어 그곳에서의 몇 년이 보장된다 할지라도 누군가의 혀가 되어 사는 일 따위 재미없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中

김정기도 토니 셰이도 스티브 잡스도 스티븐 호킹도 창백한 푸른 점을 떠나 자신만의 별이 되었다. 스물이건 마흔이건 쉰이건 예순이건, 바보건 천재건, 거지건 부자건 그 진실엔 예외가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이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나라는 우주를 빼고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왕 생의 절반쯤 지나왔다면 나를 도모할 때가 됐다. 마흔에 이르면 내 대본으로 사는 일. 그래서 포티폴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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