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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30. 2022

잘 쉬어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난생처음 2주 휴가

잘 쉬어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

7년 일하고 1년을 통으로 쉬는 사람이 있다.

화들짝 놀라서 ‘일은 어떡해요?’라고 묻는 누군가의 질문에 ‘글쎄 뭐 어떻게 되겠지?’ 라며 쿨하게 답하고는 정말로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 7년간의 일거리를 그 1년에서 찾아 돌아온다.


다니엘 핑크가 저서 [Drive]에서 소개한 오스트리아 출신 유명 디자이너 사그마이스터의 이야기다.



그는 물론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그 명성과 전문성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창의력 넘치는 디자이너가 된 것인지, 이름을 알린 이후 비로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되새기며 머리를 끄덕일 따름이다.


회사를 1년씩 떠나라는 말이냐? 지금 누군가 묻는다면, Why not?이다. 대학 교수들도 안식년이라는 제도가 있지 않은가? 


'그럼 그렇지. 우리는 디자이너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데 현실을 알고 하는 말이냐?'  '1년은 고사하고 1주일 자리 비우기도 눈치 보이는데' 라며 입을 뚱내밀고는 회사도 안다녀 본 인간의 허튼 소리라는 탄식이 여기저기 들려온다.


좋다, 정색하고 다시. 

디자이너, 교수는 돼도 왜 일반 회사원은 안될까? 그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디지털 시대로 급속히 전환되는 시점에 하필이면 코로나 팬데믹까지 덮치면서 우리는 이전처럼 일 하지 않아도 일이 진행되는 현실을 알아채버리지 않았던가? 


팬데믹 이전에도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기점으로 탄력적 근무제니 공유 오피스니 그 이전의 시대라면 말도 안된다며 손사레쳤을 일들이 여기저기 유행하던 중 아니었나? 그 와중에 뻥 터진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변화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고야 말았으니, 불행 중 의미 있는 큰걸음이라 해야 할지... 


한때 주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되면 회사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회사가 마비되거나 망하기는 커녕 몇 달씩 재택근무를 해도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민망한 기적을 경험했다. 그 와중에 누가 진짜 일하는 사람인지, 자리만 차지하던 잉여인지도 구분이 가능해졌다. 


주5일이냐 주52시간 근무냐 양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질의 문제라는 그 뻔한 진리앞에 빼도박도 못하는 외통수에 걸러버렸다. 할 일도 없이 자리에 남아 있는 야근, 주말도 없이 근무하는 월화수목금금금 따위 착취적 발상이야말로 생기를 잃은 워킹좀비들을 양산해내는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들통나버렸다.


시간과 인력을 투입 자본으로 간주하고 그저 갈아 넣으면 산출물이 나오리라 믿는(그렇게 믿고 싶은) 구시대의 경영진들이 녹색, 노란색 촌스러운 새마을 모자를 머리에 쓰고 높은자리에 올라앉은 현실은 변함이 없고, 이런 흐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도 월화수목금금금을 고수하는 기업도 적지 않으리라. 의외로 IT 기업 중에 그런 곳이 많은 모양이다. 개발자들 말이다. 


프로젝트 due date에 목숨걸고 밤낮, 주말도 없이 일하는 개발자들로 판교 IT 단지의 불야성은 2~3차산업시대에 '근면성실' 네 글자를 붉은색 페인트로 써놓고 밤낮없이 용접질 하던 산업역군을 연상케 한다. 아, 이 무슨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슴 뭉클한 신파란 말인가? 


용접기구와 삽이 키보드와 프로그램으로 바뀌고 일하는 환경이 조선소나 건설현장이 아닌, 사무실로 바뀌었을 뿐 어쩜 일잘하는 사람의 클리셰는 21세기에 들어서도 변함이 없는지.


좀처럼 개발자 뽑기 어려운 시절이라고는 하는데, 그 인력난에는 실제 실력있는 개발자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도 있지만, 이렇게 개처럼 부려먹으려는 기업들의 탐욕이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코딩 실력이 뛰어나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개발자에게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개발을 기대할 수 있을까?


5년전쯤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원래의 일에서 쫓겨나 마케팅을 빙자한 현업 지원업무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과장님, 이번 연말 휴가 2주 다녀오겠습니다."


신입사원 2년차 P는 당당히 휴가 계획을 밝혔다. 서비스산업의 마케팅 특성 상 연말연초는 일의 극성수기나 다름없는데, 자신은 맡은 바 일을 끝냈으므로 연초 연휴를 포함해 2주간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했다. 가장 바쁜 시기 휴가 가는 것은 그렇다 쳐도, 2주라니?


"어...2주?"

"네, 미리 말씀 드렸잖아요. 연말에 바빠서 야근도 많이 하고 주말에도 나오느라 힘들었고... 따뜻한 곳에 가서 좀 푹 쉬려구요. 티켓팅도 이미 해놨다구요."


야근 물론 했다. 마케팅 업무 특성상 주말에도 나왔다. 그때마다 반대급부로 대체휴일을 꼬박꼬박 챙겨주지 않았던가? 미리 말했다고? 그래 들었지. 그런데 설마 이 바쁜 시기에 정말 가겠어? 싶었다. 파트라봤자 과장인 나와, 사원인 그녀 둘 뿐인데 2주를 비우면, 연초의 일은 나 혼자 하라는 말인가?


티케팅 까지 해놨다니 순순히 승인을 해주었지만,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연초에 바쁜 일들이 몰리면서 홀로 독박 쓴 일주일이 추가로 지나갔다. 꼬박 2주를 남태평양 열사의 바다에서 보내고 돌아온 그녀는 가뭇가뭇 태닝된 구릿빛 피부를 과시하며 나타났다.


누군가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잘쉬고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해맑고 컨디션은 좋아보였다. 그 힘으로 또 앞으로의 몇개월을 버티리라. 순간 동료도 없이 연초 쏟아진 일에 지쳐 널부러진 내 처지가 한심해졌다.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이 그녀에게로 향하려던 찰나.


이봐, 당신도 충분히 쉬라고. 잘 놀고 잘 쉬는 사람이 일도 잘하는 법이야.  P는 자신의 권리를 이행한 것 뿐이고 미리 말도 했어. 네게 주어진 정당한 쉼의 권리를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고 누굴 원망하는 거야? 


어디선가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휴가 뿐이야? 할일도 없는데 눈치보며 야근하는 척하고, 팀장이나 상무가 자리에 있으면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술한잔 하자는 말에 자동반사로 따라붙고, 심지어 주말에도 골프니 등산이니 내키지 않은 그 분의 요청에 신경 쓰느라 네 인생은 어디로 간거야?


그래 누가 가둔적도 없는데 왜 스스로를 속박하는 상자안에 들어가 갇혀 있던걸까? 내심, '다들 이렇게 살아' 라는 체념으로 흘려 보냈던 그 시간들이 내게 주었던 편익은 무엇이었을까?


반면, P는 철저히 스스로를 도모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컨디션과 성장을 관리해나갔다. '우리때는', '나때는', '어디 신입이' 따위 보이지도 않는 타인의 대본에 얽매지 않고 자기대본을 써내려갔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인사권, 평가권을 가진 상사의 비위를 맞출줄도 알았다. 그녀의 앞날은 스스로 만든 길을 따라 탄탄하리라.


사그마이스터의 1년이 비로소 들어왔다. 그의 1년은 향 후 7년의 먹거리를 그에게 만들어줬다. 그 먹거리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진될 것이다. 그러면 또 1년을 훌쩍 떠나 자신의 내면을 충전하고 한 껍질을 벗게 될 것이다. 그 일이 반복되며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전문성과 명성, 그리고 인간으로서 삶의 균형도 손에 잡았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해 그는 자기 분야의 거인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그 일을 대신해줄까?


잘 쉬어라. 그러면 내일을 위한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질 것이다. 매일, 한달, 두달 그리고 1년, 2년이 쌓여 도달한 새로운 세계. 바로 '성장'이다. 성장이 멈추면, 거인이 될 수 없다. 타인이 끌어주고 올려주고 낙하산으로 꽂아주지 않는 한 눈앞의 장벽을 넘을 수 없는 난장이로 머물 따름이다.


잘 쉬어라. 그리고 자신의 대본으로 자신을 도모하라. 그게 세상을 향한 최고의 복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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