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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05. 2023

나쁜 놈들 전성시대, 세상은 정말 흉흉해지고 있을까?

나쁜 종자 Bad Seed _錄 in 프롤로그

충격적인 사건 사고 뉴스가 며칠 사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신림동 칼부림 사건, 서현역 칼부림 사건, 마약에 취한 운전자 사고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며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사람 사는 사회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치부하기엔 그 빈도나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35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함께 올여름 우리를 잔뜩 위축시키고 감정적으로 힘들게 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적이 있었던가? 그저 뉴스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나와 상관없다 느꼈던 것이 이제는 나와 내 주변의 일일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거 호신용 무기라도 구해 지니고 다녀야 하나 싶기도 하다. 건장한 남자들도 그런데 아이들이나 여자들이라면 오죽할까?


세상이 갈수록 흉흉해진다고들 한다. 이런 말을 들은 지도 벌써 수십 년은 되는 것 같은데, 정말 세상은 갈수록 흉흉해진 게 맞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나쁜 놈들이 그 이전보다 늘어났다는 것일까?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비범죄자라는 뜻일까? 세상이 흉흉해지면 어떻게 얼마나 흉흉해지고 있을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대처방안은 뭐가 있을까? 먼저 사실관계를 확인해 봐야겠다.


지난 10년간 범죄발생 통계부터 한번 살펴보자


한국일보. 2019년


어? 뭔가 이상하다. 매년 사회가 흉흉해져 왔다면 통계도 그에 맞게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5대 강력범죄인 살인, 강도, 강간, 폭력, 절도 발생 비율은 매년 유의미하게 증가해 10년 전과는 두 배 세배 이상의 차이를 보여야 맞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 숫자를 보니 체감상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적어도 이 통계만으로는 세상이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


매년 일정한 비율을 유지할뿐더러 살인이나 폭력, 강도 비율은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2019년 자료이긴 하지만 추이라는 것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어느 해에 갑자기 튀거나 줄지 않는다는 특성을 감안하면 2023년의 통계 역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5대 강력범죄 발생비율은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해가 갈수록 강력범죄, 특히 살인이나 강도처럼 사회를 경악케 하는 범죄가 늘어나고 그 흉폭함의 정도가 세지고 있다고 느낄까? 어쩌면 더 자극적이고 더 극단적인 사건, 사고를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니며 시청률 올리기에 혈안이 된 레거시 미디어들의 과도한 경쟁 때문은 아닐까? 그런 미디어 콘텐츠에 일방적으로 노출된 대중은 갈수록 자극에 둔감해지고 시선을 끌기 위해 더 강력한 사건사고를 무의식 중에 갈망하는 자본의 습성이 반영되어 생긴 악순환의 결과는 아닐까? 하는 생각. 자극이 강렬할수록 같은 패턴의 모방 범죄가 생기고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체감상 훨씬 더 빈번하게 더 끔찍하게 인식된 결과일 가능성 말이다.


물론, 통계가 전부는 아니다.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천인공노할 범죄가 있을 수도 있고, 더 강력한 힘으로 아예 묻어버린 범죄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느끼는 것이지 통계 따위 무슨 소용이냐?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과도한 불안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동물로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불신이 일상에 끼치는 해악이 너무 크기 깨문이다. 특히 이런 사건사고를 계기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에 휩싸여 서로를 적대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부풀려 소모적 분쟁을 일으키는 사회적 낭비가 갈수록 커진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악이든 선이든 하나의 속성만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은 합리적인가? 어느 쪽이든 인간이라는 복합적 존재를 하찮 존재로 끌어내리는 궤변이고 억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악한면과 선한 면 양면을 모두 가지고 태어난다는 편이 훨씬 더 설득적이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환경에 영향을 받아 악인(범죄자)이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대체적으로 선과 상식의 영역에서 소소한 실수, 잘못을 저지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용서를 받거나 숨기거나 그러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때때로 뉴스나 영화, 드라마에 등장해 우리를 경악케 하는 진짜 악인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 중에 그런 가능성을 가진 예비범죄자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체계와 감정, 상식을 가진 다른 종족이 있는 걸까?


이 논의에 관한 한 성악설 관점에서 논의할 여지가 있다. 과학은 이미 이 종족의 존재를 증명해 냈다. 소시오패스 연구의 권위자 마사 스타우는 자신의 저서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인구통계학상 양심 자체가 없는 특별한 종족이 약 4%의 비율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시대와 국가, 문화를 가리지 않고 일정 비율로 섞여 있다고 단언한다.


양심이야 말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종족을 구분하는 특질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 애착을 기반으로 한 책임감'을 뜻한다고 마사는 덧붙였다.


인간에 대한 애착이 아예 없는 인간이라니 상상이 되는가? 환경의 영향이고 뭐고 태어날 때부터 뇌의 배선 자체가 형성이 안된 탓에 타인은 물론 자신의 감정에도 무감각한 존재, 애초에 이 기능이 기본 장착된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그런 상태가 뭔지 짐작조차 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를 소시오패스로 사이코패스로 단정 짓고 판별해 내는 일은 평범한 우리의 영역은 아니다. 수십 년을 전문적으로 이들을 연구해 전문 진단툴인 PCL(Psychopath Check List)을 개발한 로버트 D. 헤어 박사조차 진단과 판별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심지어 그 대상이 형이 이미 확정된 범죄자였음에도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와 헤어 등 대표 학자들은 이들에 대해 일반인들도 알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양심이 결여된 상태로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품은 이들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들은 분명한 비율(학자에 따라 1~10%까지)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한번 이들의 표적이 되어 휩쓸리면 그 해악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과정은 엄격해야 한다.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관심을 두고 지켜보되 적어도 검증  근거와 분명한 행태적 증거를 교차 검증함으로써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그저 나와 스타일이 달라 맞지않을 뿐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을 그들 종족으로 오해하지 않는 일이다.


나는 이것을 양심의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평범한 우리는 누구나 양심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태어난다. 사람에 따라 양심의 스펙트럼 극단에 존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오른쪽 극단에는 예수, 부처, 법정 스님, 프란체스코 교황 같은 성자가 있고 왼쪽 극단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자기성애자(나르시시스트)들이 있다.

양심의 스펙트럼

문제는 스펙트럼을 벗어난 자들이다. 아예 양심이 없는 사람들. 이들은 서슴없이 나쁜 짓을 저지를 가능성을 품은 시한폭탄과도 같다. 비단 범죄를 일으키지 않더라도(실제 이들이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은 극히 낮다. 물론 일반인의 그것에 비해서는 월등히 높지만) 타인을 괴롭히거나 이용하거나 가차 없이 배신하는 일에 도가 튼 자들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 시대 성공한 비즈니스맨들의 다수가 소시오패스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높은 이성지능으로 엄청난 성과를 내지만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는 무감각한 차가운 심장을 지닌 이들을 그저 스마트한 엘리트라고 부르며 숭배하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우리 사회가 겪는 극단적 결과지향,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인간성의 상실, 인명경시 풍조가 오늘날 전 사회적인 분노를 유발해 묻지 마 범죄를 부추기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양심의 스펙트럼을 벗어나 있다는 근거만 확실하다면, 이들은 우리와는 종족 자체가 다른 '나쁜 종자 Bad Seed'로 단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들을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 '생각하는 하이에나' '고장 난 아날로그 라디오' '전사의 후예' 등으로 구분해 설명할 것이다.


물론 스펙트럼 내에 속해 있어도 나쁜 사람(나쁜 종자가 아니라 '사람'이다)은 존재한다. 양심이 있긴 하지만 극히 희미하다면,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나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스펙트럼 내에 있기만 하다면 공감, 양심은 얼마든지 채워 넣거나 강화하는 일이 가능하다. 상대의 입장을 직접 경험하게 하거나, 풍부하고 직접적인 사례를 공유해 주는 것만으로 공감능력은 좋아질 수 있다.


이 스펙트럼에 따르면 나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과거의 나는 스펙트럼의 왼쪽 극단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행인 것은 희미하게나마 스펙트럼의 안쪽에 들어와 있어 나를 바꿀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내 위주고 이기적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그 이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펙트럼 안에 있기만 하다면 0에 가까워도 학습과 훈련을 통해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믿게 됐다.


분명한 건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 닥쳐올 미래나 애초에 양심이 스펙트럼 바깥에 존재하는 나쁜 종자 Bad Seed 의 비율은 일정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이들의 해악은 여전하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대다수는 나와 같은 평범한 종자일 뿐이니까.


당신의 양심 스펙트럼은 어떤가? 내 주변은 어떤가? 세상은 정말 흉흉해졌는가? 우리를 불안에 떨게하는 진짜 악인 나쁜종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객관적 시각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나쁜종자를 찾는 여정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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