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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12. 2023

"원래는 착했어요" 악마가 된 천사

나쁜 종자 Bad Seed 1_Lucifer effect는 없다

"착했던 애예요. 나한테 잘해줬었고.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그땐 눈빛이 지금 같지 않았어요."

지안은 자신을 괴롭히던 사채업자 광일과의 악연을 동훈에게 털어놓는다. 착했던 어린 광일이 지독한 악인이 된 이유는 지안이 광일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 비록 알콜중독에 폭력을 일삼던 망나니에 가까운 아버지였지만 이 일을 계기로 광일은 지안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괴롭힌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로 꼽는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 속 광일처럼 원래 착했던 사람이 갑작스레 악인이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은 두려움, 불안감, 증오, 집착 그러나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진짜 감정인 애정에 이르기까지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내면 조각 뒤엉키게 함으로써 분노를 유발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공포스럽지만 돌아서면 짠한 광일이라는 입체적 캐릭터를 완성했다. 물론 주인공 지안 역시 광일 못지않은 입체적 캐릭터인데다 살인자라는 전과도 있지만 전형적인 악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뭔가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살인자와 사채업자가 전형적인 악인이 아니라니?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 대천사 루시퍼가 타락해 최초의 악마가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에서 따온 용어. 1971년 필립 조지 짐바르도가 스탠포드 대학교 지하에서 진행한 모의 감옥실험에서 발견한 내용들을 정리해 이름 붙였다. 그 유명한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권위에 굴복해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착한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일까? 유명한 실험결과들과 성경에 기록된 타락한 천사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글쎄, 나는 회의적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착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악인이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그 이유 '어떤 계기' 다. 스탠리 밀그램 실험 역시 비윤리적 행위를 지시하는 '권위자'가 존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진)중 일부는 그들의 명령을 '계기'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들을 평범한 사람, 아니 적어도 처음부터 선한마음을 타고 태어난 존재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독한 가난, 아버지의 학대와 폭력, 그 아버지의 죽음까지... 그것도 타인에 의한 살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지 않은 환경에 노출된 착했던 아이 광일의 변신은 그래서 개연성이라도 있다. 존재 자체가 공포였을 아버지의 죽음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임과 동시에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에 온전히 내쳐졌다는 양면성을 모두 지닌다.


이 애증의 대상을 살해한 지안이라는 존재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낼 명분이자 타겟이 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그러나 나를 해방시켜 준 영웅. 더 깊숙하게는 어린 시절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깊은 애착으로 엮인 인연.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뒤틀린 형태의 복수라는 광기로 돌변해 또 다른 애증의 대상이 된다. 복수는 광일이 지안과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도 작용한다. "이렇게 해야 너를 매일 볼 구실이 생겨"라는 진짜 속내. 이런 광일을 전형적인 악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대체로 착한 사람은 계기가 있어도 악인으로 변하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양심, 인간에 대한 애착과 연민을 타고 태어난 보통의 인간은 손에 칼을 쥐어줘도 그 칼로 절대로 사람을 찌르지 못한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우발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는 한다. 착한 사람이 저지르는 일부 악행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일어나고 지안의 살인 역시 그러하다(물론 죽여 마땅한 인간일지라도 목숨을 앗는 범행 자체가 온전히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는 믿지만...)


진짜 악인은 아무런 계기 없이도 악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진짜 악인은 입체적이지 않다. 처음과 끝이 모두 같다. 이들에게 개과천선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개과천선은 원래는 착했던 사람의 단어다. 이들은 애증이라는 복합적 감정 자체를 가졌거나 느끼는 능력 자체를 타고나지 않았다. 하루라도 못 보면 죽고 싶을 만큼 사랑하면서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양 극단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 편의, 쾌락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르고 급기야 목숨까지 뺏는 종족들이다.


진짜 악인과 일반인이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양심의 유무다. 앞선 글에서 '양심의 스펙트럼' 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이 스펙트럼 안에 존재한다. 이들 역시 무수한 이유로 갖가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진짜 악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양심의 가책을 겪는다는 점이다.


광일 역시, 지안에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양심에 괴로워하다 드라마 말미에는 원래의 본성을 어느 정도 되찾는다. 지안의 진심과 동훈의 위로를 남몰래 듣고 가슴속 깊은 곳에 꿈틀 대던 양심이 마침내 표면화된다. 자신과 상대의 진심을 직면하는 순간, 광일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악마의 가면을 벗고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지안과 동훈의 편에 선다. 광일이 양심의 스펙트럼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며 "착했던 애예요..." 라는 지안의 대사를 완성하는 귀환의 순간이기도 하다.


악의 본질은 심플하고 플랫 하다. 복잡하지 않고 지극히 일차원적이며 양면적이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만 극단적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 인해 주변이 야금야금 파괴된다. 오직 그 자신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괴로워진다.


다행인 것은 이런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나와 내 주변의 보통의 사람들은 사랑도 하고 증오도 하고 극단의 양면을 오가며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실수와 나빠 보이는 행위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상식선에서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착했던 애예요." 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은 적 있다면, 진짜 악인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양가적 감정에 괴로워하는 광일같은 존재에게는 마음놓고 손을 내밀어도 괜찮다.


세상은 여전히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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