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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13. 2023

우리 반, 우리 팀, 우리 집에 소시오패스가 산다

나쁜 종자 Bad Seed 2_우리 주변의 소소한 소시오패스

주형은 학교에 가기 싫다. 3학년에 올라가 새로운 마음으로 즐겁게 시작한 새 학기는 어느 순간 악몽이 됐다.

"잘 지내보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민수와 친해진 후 어쩐 일인지 학교 생활은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지나칠 정도로 잘해주고 과도한 관심을 보였던 민수가 어느 순간 돌변한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생겼다 싶었던 주형은 당황했다.

또래보다 손바닥 한 뼘은 큰 체격에 활발하고 리더십이 강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던 민수는 반 친구들을 금세 휘어잡고 차츰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고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거친 욕설과 함께 급기야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민수의 압도적 영향력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 무리를 만들었고 반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몇을 찍어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야, 너희들 얘한테 말 붙이거나 잘해주면 너희도 같은 취급당할 줄 알아."

민수와 그 무리들은 급기야 한 친구를 찍어 집단으로 따돌리고 돈을 뺏고 심부름 따위를 시키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주형은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민수의 눈빛에서 악마가 있다면 저런 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언제 민수 무리들이 방향을 틀어 자신을 향할지 알 수 없어 학교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 됐다.

민수는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소시오패스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다. 이들은 인구통계학상 약 4%의 비율로 존재한다. 세계 어느 나라든, 어떤 문화권이든 사람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사회에는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된 상태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1~10% 사이로 조금씩 다르지만, 소시오패스를 전문으로 연구해 온 마사 스타우트 박사가 주장한 4% 론이 가장 현실적인 듯 보인다.


4%, 어떤 느낌이 드는가? 애매하다. 그리 많다고 볼 수도 없고 완전히 무시하기도 힘들다. 묘하다. 이걸 실제 숫자에 적용해 보면 생각이 바뀐다. 우리 인구가 5000만이니까 4%는 약 200만이다. 25명 중 1명이다. 중고등학교 한 학급의 학생 수가 약 20~30명 정도니 학급마다 1명의 소시오패시 성향 보유자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 정도면 드라마, 뉴스, 영화에서나 볼법한 존재가 아닌 바로 내 옆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소시오패시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저 드라마, 뉴스, 영화에서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이미지만을 소비하며 막연히 나와는 상관없는 저 세상의 악마적 존재 정도의 인식만 갖고 있지 않은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여주인공 조이서는 무려 소시오패스다. 캐릭터 소개에도 당당히 그렇게 쓰여있는 데다 "제가 성격이 좀 꼬여 있어서 중학교 때 정신과 검진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소시오패스 성향이 79%라네" 라는 대사를 통해 제 입으로도 확인해 준다.

일단 조이서의 대사조차 여러 오류들이 뒤섞여 있다. 성격이 좀 꼬였다거나 정신과 검진을 통해서 진단이 가능하거나 성향 지수가 몇 % 라거나 이런 설정들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드라마 초반 고등학생이면서 소시오패스로 설정된 조이서의 구체적 설정만 봐도 얼마나 소시오패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극 중 조이서는 머리도 좋고 운동, 음악, 미술 등 못하는 것이 없다. 특히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쟁취하고야 만다. 외국에서 전학을 온 만능 캐릭터로 학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특히 팔로워 60만이 넘는 유명 인플루언서다. 어느 날은 집단 괴롭힘을 목격하고 그 가해자를 응징하는데 그 이유가 놀랍다. 정의구현 응징 뭐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잠을 방해하고 물건을 말없이 가져갔다는 이유에서다. 괴롭힘 장면을 휴대폰으로 찍어 자신의 SNS 계정에 올려 버린다.


학교 친구이자 단짝인 장근수라는 인물도 조이서를 ‘소시오패스’라고 단언한다. 아예 처음부터 나 ‘소시오패스’요 라고 광고하면서 시작하는 셈이다. 제멋대로이면서 매력적인, 특출 난 능력의 소유자. 특히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쟁취한다.’ 이 특질이 눈에 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하다.


문제는 소시오패시를 설명하는 특질들이 사실에 가까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는데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는 이 문제적 존재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몹시. 무려 여주인공인 조이서의 설정을 소시오패스로 했을 정도면 이 무시무시한 괴물적 존재를 오해해도 한참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이서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소시오패스 성향도 없다.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조이서라는 캐릭터에 몰입할수록 소시오패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된다.  


드라마는 15부작에 이르는 만큼 스토리가 방대하다. 간략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조이서는 소시오패스답게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고 단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박새로이는 남자 주인공을 만나 그의 포차 ‘단밤’에서 일하며 그의 복수와 성장을 돕는 이야기다.


조이서의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변하는데 박새로이라는 남자주인공에 호감과 궁금증을 가지게 되면 서다. 무려 S대 입학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그의 신생 포차에 들어가 매니저로 일한다는 설정이다.


마사 스타우트는 소시오패스의 가장 확연한 특징으로 양심 없음을 들었다. 양심이란 타인에 대한 감정적 애착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의무감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단서를 조이서에 대입해 보면 즉시 알게 된다. 소시오패스가 타인에게 호감과 궁금증을 가진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한다?


그래 뭐 아직까지는 감정이 아니라 호감과 궁금증이라고 했으니 더 두고 보자.


어느 날 조이서는 학교를 땡땡이치고 장근수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이태원 클럽으로 향한다. 하필 단밤 포차를 열고 홍보 중이던 박새로이와 사고로 조이서와 조우한다. 이미 이 둘은 안면이 있다. 자신이 응징한 학폭 가해자 엄마와 맞닥뜨린 상황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해프닝으로 끝나는가 싶던 둘의 관계는 이 사고를 계기로 다시 이어진다.


오토바이 사고로 기절한 박새로이가 응급실에 실려 가고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다시 마주한다. 박새로이는 불굴의 오뚜기 캐릭터답게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미안하면 놀러 오라며 포차 전단지를 쥐어주고 쿨하게 자리를 뜬다.


이후 이태원을 다시 찾은 조이서와 그 일행들, 미성년자 신분으로 술을 마시려다 여의치 않자 새로이의 포차 ‘단밤’을 찾는다. 단밤의 직원은 그들이 미성년자인 것을 눈치 채지만 장사가 안되어 고민이 깊던 차에 눈을 감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신고로 단밤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물론, 박새로이라는 캐릭터는 멋지다. 게다가 경찰서에서 그가 보인 당당한 태도는 당장의 이익에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군상들과는 어딘가 다르다. 장근원이라는 라이벌이자 빌런과의 소동으로 그와 얽힌 악연의 스토리가 살짝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멋짐 폭발이다. 이때부터 조이서는 박새로이에 감정적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이서가 소시오패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시오패스는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느껴도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해석할 수 없다. 감정적 애착이 애초에 없으니 의무감 또한 없다. 자신으로부터 생긴 타인의 피해에도 별다른 의무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해야 한다. 이성으로서의 호감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몇 개월 후 조이서는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어 친구들과 이태원을 찾는다. 우연히 술자리에 동석한 남자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쫓기는 위기에 처한다. 짐작하겠지만 도망치던 이서는 또다시 박새로이와 재회하게 되고 박새로이는 그녀를 돕는다(이거 너무 우연의 남발 아닌가).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다는 그녀의 철칙에 따라 둘은 술을 마시게 되고, 조이서는 박새로이의 과거와 현재를 들으며 완연히 그의 매력에 빠진다.


"쓸쓸하다는 이 남자의 삶이 달달했으면 좋겠다. 이 남자의 삶을 달달하게 해주고 싶다."

"나의 이 마음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거리, 좋아한다."

라는 오글거리는 대사와 함께 급기야 키스신이 펼쳐진다.

게임 끝.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조이서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우연이 남발되고 여주인공이 소시오패스라는 설정에 근본적 오류가 있지만 이들의 연기와 캐릭터는 그 허점을 압도할 만큼 매력적이다. 소시오패스의 특질은 누군가로 인해, 어떤 경험으로 인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사회적 성격장애’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당사자 스스로가 병으로 생각하거나 고쳐야 할 장애라고 인식하지 않아 추적도 식별도 치료도 어렵다.


감정적 애착의 결여는 심지어 가족도 가리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소시오패스가 누군가 타인을_그 사람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_ 통해 그 특질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나 유아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그 특질이 이미 발현된 경우라면 개선 변화의 여지는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조이서는 박새로이라는 타인을 만나 감정을 느끼고 애착을 가지며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단 하나도 증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들을 전지적 시점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 우직하고 신념이 강한 박새로이를 다만 이용할 뿐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앞서 가장 눈에 띄었던 특질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쟁취한다.’라는 특질 또한 소시오패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의 ‘어떻게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법성과 비열함, 비양심을 포함한다. 조이서의 과정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공감능력은 지극히 떨어지지만 타인에 대한 애착, 연민이라는 양심은 가진 자기성애자(나르시시스트)라면 말이 된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고 저 자신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스트가 운명의 상대로 인해 마침내 성장했다는 스토리라면 합당하다. 애초에 감정이,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원래는 있는데 어떤 이유로 닫혀 있거나 얼려졌던 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유로 조이서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태라 했다. 인간미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그들의 마수에 속절없이 휘둘려 악몽같은 나날을 보내지 않으려면, 반대로 엄한 사람을 그들로 오해해 불필요한 관계의 단절을 겪으며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소시오패스를 보다 정확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 대한 감정, 애착을 기반으로 하는 양심이 아예 없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착취하고 기만하는가? 타인의 괴로움을 보고 즐거워하는가? 25명 중 1명, 그들은 우리 반에, 우리 팀에, 우리 집안에 1명 꼴로 존재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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