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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19. 2023

정 팀장이 술만 마시면 헐크가 되는 이유

나쁜 종자 Bad Seed _ 3. 주폭

"야, 술 한잔 따라봐."

"예?"

"술 한잔 따라보라고 이 새x야."


김 과장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존댓말을 써가며 그렇게 친절했던 정 팀장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반말과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직급 차이가 나기는 해도 엄연히 타 팀 사람인 데다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었다.


"아이고 팀장님 많이 드신 것 같은데..."

"뭐야? 너 나 무시하냐? 요즘 새x들은 싸가지가 없어!"

[탕!]

급기야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모처럼 전사 변화 워크샵을 마치고 화기애애했던 뒤풀이 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니들 나 우습냐? 같잖은 것들이 실실 웃으면서 대해주니까 아주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지?"


1시간도 안돼 소주 2병, 맥주 1병을 들이켠 탓인지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충혈된 눈은 초점을 잃고 언뜻 광기가 엿보인다.


"에헤이 참으세요 팀장님. 좋은 자리에 왜 그러세요."

"이 새x 너도 내가 우습냐?"

[짝!]

급기야 말리던 제 팀 박 대리의 뺨을 한 차례 후려갈긴다.   


"아씨 진짜 술만 마시면..."

"참아 박 대리"

김 과장은 서둘러 박 대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다독인다. 박 대리의 오른쪽 뺨이 손바닥 모양으로 벌그죽죽하다. 박 대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그 버릇 개 못주지..."

"아니 평소 그렇게 젠틀한 양반이 진짜 깜짝 놀랐네"

"술이 좀 과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저렇다니까요. 본인도 그걸 알고 최근에는 술자리 자체를 자제하는 것 같더니만 오늘은 무슨 봉인이라도 풀린 건지...위태위태하다 싶더니만..."


슬쩍 술집 안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소란스럽다. 정 팀장은 눈이 돌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소리를 지르고 옆 사람을 위협하는 몸동작으로 부산하다. 그렇게 1년 만의 변화혁신 리더 워크샵 과정은 엉망으로 마무리 됐다.



다음날,


[띵~] 사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뜬다.


'영업팀 정xx 팀장입니다. 전날 술이 과해서 기억이 온전치 않지만 여러 동료분들께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정중히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음, 기억은 안 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어쩐지 출생의 비밀과 삼각관계와 김치 싸대기 씬이 난무하는 아침 드라마의 클리셰 같다. 정말 정 팀장은 어제의 기억을 통째로 상실했고 주폭 피해자들에 미안한 마음이 있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까?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가능성이 99.9% 다.


한마디로 주폭. 이들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나쁜 종자' 범주에 넣을 것인가? 고민이 많았지만 일단 다뤄보기로 한 이유는 주폭 성향은 대체로 타고나는 편인 데다 실생활에서 발생 빈도가 높고 그 피해 또한 상당하기 때문이다. 멀쩡히 술 잘 먹다가 욕을 먹거나 모욕적 언사를 듣는 가벼운 봉변은 물론 음주운전으로 이어지거나 뺨을 맞거나 큰 싸움으로 번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귈 때는 술을 먹여봐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충고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술을 즐기고 또 술에 관대한 우리의 문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사회 전체가 술독에 빠져 있다고 해도 어색함이 없다. 고도의 경쟁사회, 빨리빨리 문화에 내몰리며 일종의 집단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사람이 술 먹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는 술에 대한 기괴한 너그러움까지 생겼다. 심지어 법정에서도 주취 상태의 범죄는 심신미약이라며 정상참작이 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이유로 유독 우리나라에 주폭들이 많은 것일까?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보통의 사람들은 술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웬만하면 주폭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성향을 타고 난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전사 유전자 Warrior gene 를 그 원인으로 본다.


뇌과학자이자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제임스 팰런의 저서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에 따르면 전사유전자 Warrior gene는 외부 자극에 반응해 대뇌에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등)을 분해하는 MAO-A(모노아민산화효소) 발현을 억제하는 유전체 MAOA 의 기능저하를 뜻한다.


적이나 맹수를 만났을 때 인간은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기 위해 도파민 등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고 몸은 일종의 흥분상태가 된다. 일단 위기 상황을 벗어나면 MAOA의 작용으로 분비된 신경전달물질을 산화시켜 평상시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전사 유전자가 발현된 사람이라면 이 유전자가 모노아민신경물질의 산화작용을 방해해 흥분 상태가 상당시간 지속된다.


전사 유전자는 X유전자에 한해 약 30%의 확률로 발현되는데 남성의 유전자는 XY로 구성되므로 남성의 전사 유전자 발현 확률은 30%가 된다. 반면 여성의 경우 XX로 유전자가 구성되므로 30% x 30% = 9% 로 낮아진다.


돌발상황에서 손쉽게 싸울 준비에 돌입하고 그 상태를 한동안 유지하는 능력을 가진 잠재적 전사들이 남성은 10명 중 3명, 여성은 10명 중 1명 꼴로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왜 호전적이거나 주폭을 일삼는 사람들은 남성이 압도적인지, 드물긴 하지만 여성들 중에서도 그런 유형이 존재하는지 설명해 준다.


물론 전사유전자가 발현되지 않은 일반인들도 술자리에서 흥분하거나 소란에 휩싸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격분에 이르는 트리거(격발)의 하한선이 상대적으로 높고 격발이 되더라도 MAOA가 작동해 흥분 상태가 곧 가라앉는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경우 작은 소란 선에서 해프닝처럼 마무리된다.


반면 상습 주폭들은 평소에도 격분의 트리거 하한선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술이 들어가면 더 낮아진다.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격분에 휩싸이고 한번 격분 상태에 이르면 그동안 숨겨왔던 제2의 인격인 헐크가 전면에 등장한다. 한번 등장한 헐크는 웬만해선 퇴장하지 않는다.


상습적인 음주운전 역시 이들이 주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술에 취해 감정적 트리거가 작동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지고 하나의 목표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주변 상황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 윤리적 당위성, 사고의 위험성 따위는 이성에서 사라지고 행위하려는 본능만 선명히 살아난다.


상습적인 주폭과 음주운전자들이 다음날 격분상태에서 벗어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얼마 못 가 되풀이되는 이유다. 멀쩡한 정신일 때 그 각오와 의지는 진심이겠지만, 트리거가 작동해 등장하는 헐크는 의지와는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가 이성을 얻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유전되었을 것이다. 부족원 중 누군가는 적이나 맹수를 맞닥뜨렸을 때 그 즉시 몸을 전투 상태로 만들어 두려움 없이 대적하거나 빠른 몸놀림으로 그 상황을 벗어났을 것이다. 즉 전사들은 모두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들은 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 후손을 30%나 남겼지만, 문제는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온전한 의미에서의 전사가 필요 없게 된 데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가 술자리를 핑계로 그 본능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사가 아닌 70%의 평범한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무려 10명 중 3명이나 되는 이들을 완전히 우리 주변에서 배제하거나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감정적 격분에 휩싸일 트리거를 작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사자라면 술자리에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면 딱 거기까지다. 트리거가 작동해 이미 흥분상태에 이르렀다면, 공격성의 타깃이 되는 상대를 분리시키거나 필요하다면 현장의 전원이 대응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이 좋다. 공격 대상이 사라진 전사의 대뇌는 MAO의 도움 없이도 차츰 정상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깊게 알고 싶다면 반드시 술자리를 가져봐라. 그 이전에 아무리 친절하고 인간적이고 순수했다고 한들 술이 들어가고 그 이면에 숨겨진 헐크가 등장하는 순간을 목격했다면 진지하게 충고한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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