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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Dec 30. 2023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쁜종자 Bad Seed _ 6. 위선조차 없는 순수 악

나는 위선자다.

때때로 솔직하지 못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도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기도 한다. 그땐 왜 그랬을까? 이불킥 하게 만드는 실수나 과오도 적지 않다. 혼자 있을 때와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의 내 모습이 달라 괴리감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를 시기, 질투하고 증오도 한다.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았을 수 있다. 아니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전적으로 내 행동과 말 때문인 탓도 있을 테고 별 다른 이유 없이 그랬을 수도 있다.


대책 없는 자기혐오나 무책임한 자기 합리화라는 양 극단으로 빠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믿음 때문이다. 누구나 잘못을 하고 어리석은 일도 한다. 문제는 잘못을 했으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필요에 따라 대가를 치르고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 마음먹을 수 있는가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의 내면은 조금씩 성장한다. 그러고도 또 다른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


인간이기에 위선적일 수 있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본능에 따른 생존을 이어갈 뿐, '이런 짓은 내게 유리하지만 전체를 위해 하면 안 된다'는 공공의식을 가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훈련에 의해 특정 행동을 야기하거나 억누르게 할 수는 있어도 윤리나 도덕 법률, 최종적으로 양심이라는 고차원적 정신 활동은 오직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가진 인간만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다.


위선은 양심과 행동의 괴리에서 오는 간극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자기 포장이다. 얼마나 의지력을 발휘해 자신이 가진 불완전성을 보완하고 생존 본능에 따른 이기심을 억누를 수 있는지에 따라 '선'이라는 무형의 가치가 만들어진다.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 나머지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수는 있어도 대다수 평범한 우리는 내면에 이기적 본능과 이상적 자아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삶을 살아간다. 때로는 본능이 이길 때도 있고 때로는 이상적 자아가 이기기도 한다. 이때 위선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요즘 세상이 하 수상하다.

유명 배우의 죽음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와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던 나 역시 그 후폭풍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허망한 죽음이 위선에 대한 상념을 부추겼다. 그 일을 주도한 자들의 진짜 의도와 노림수를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포착한 혐의가 사실이라면 그에 반대할 이유도 없다. 다만 물증을 찾지 못했다면 서둘러 종결했어야 할 일이다.


애초에 고인이 왜 그런 이들과 어울렸을까?라는 일말의 힐난도 잠시 접어둔다. 엄연히 별건인 데다 그와 사적 인연이 있는 지인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비난과 질타를 받을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사생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과정을 처음부터 만들고 소비해 온 한 줌 위선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하이에나떼의 준동이 역겨울 따름이다.


최근 학폭 논란에 휩싸인 수십만 헬스 유튜버와 그를 두둔한답시고 학폭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또 다른 헬스 유튜버의 존재도 신경 쓰인다. 그는 '학폭은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그 시기의 남학생에게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그런 일로 성인이 된 이후까지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학폭 논란 유튜버를 두둔했다.


정치권부터 배구계, 야구계, 연예계에 이어 헬스계까지 사회 전반에 학폭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춘기 남학생 누구나 타인을 괴롭히고 싶어 한다라는 뇌피셜 인식도 놀랍지만 더 우려가 되는 것은 사회정의를 말하는 진보지식층과 사회 전체를 충격으로 빠뜨렸던 국가적 사건사고에 대한 그의 시선이었다.


착한 척, 정의로운 척, 공정한 척은 다하지만 사실은 구린 구석이 많은 위선자들이 선동에도 능해 자극적인 몇 마디로 대중을 속이면 거기에 휘둘려 놀아나는 개돼지들이 많다는 주장. 개인의 생각이야 자유라지만, 속 시원한 결론도 없이 여전히 논란 중인 민감한 사회적 이슈인 데다 그 일로 인해 직간접적 피해를 받은 무수한 사람들이 그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마당에, 무슨 근거로 스스로 단정 짓고 가해자를 두둔하고 사람들의 집단행동을 선동에 휘둘렸다 비하하는 것일까?


그런 위선자들보다, 선동에 휘둘리는 개돼지들보다 차라리 대놓고 반칙과 악행을 일삼으며 힘을 축적하는 이들이 더 현실적이고 낫다는 삐뚤어진 인식에는 어떤 광기마저 엿보인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이들의 동물성에 대해 주목한다. 힘을 추종하는 본능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이란 바로 돈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좇는 일에 경도되어 위선 따위 거추장스러운 가면은 내팽개치고 날 것 그대로의 시뻘건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거리낌 없이 힘을 추종하고 더 큰 힘에 순순히 굴종하는 비굴함까지.. 어쩌면 이들은 인간보다 동물에 더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 따위는 상관없고, 일부 희생이 발생해도 어쩔 수 없고, 약자들의 감정이입하며 일희일비하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서늘함을 기본 장착한 엘리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에게 돈으로 대변되는 성과를 추종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타인에 대한 애착, 거기에서 비롯되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이들은 종종 사회적 비극 앞에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끔찍한 가정들을 합리성을 가장해 배설한다.


예컨대 어떤 죽음을 돈으로 환산하고 그만큼 보상받았으면 됐지 않느냐 잊으라고 말하는 일. 학창 시절 내내 괴로움에 떨며 죽음을 생각했던 학폭 피해자 앞에서 재미로 그랬을 뿐, 뭐 그런 걸로 일을 크게 벌이느냐 적반하장 하는 일. 따위.


세상 어떤 평범한 사람이 타인을 재미로 괴롭히고 그들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할까? 세상 어떤 부모가 제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돈으로 계산할까? 그나마 머리라도 좋다면 그런 속내가 있어도 대놓고 밝히지 못한다. 그게 상식이고 윤리고 도덕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을 도구로 보고 이용하려는 자, 그 속내를 부끄러움도 없이 거침없이 드러내는 자. 바로 그들이 범인이다.


위선은 양심이 자극해 씌워지는 가면이다. 위선조차 부릴 줄 모르면서 제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가슴에 구멍난 자들이 진정한 악을 만든다.


나는 차라리 영원한 위선자로 남기로 결심한다. 위선자라고 욕하고 조롱해도 좋다. 



故 이선균 배우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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