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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May 20. 2024

마흔여덟, 죽음을 준비할 때

마흔이 넘으면서 슬슬 고민이 시작됐다


'내 인생 이대로 괜찮을까?'


퇴사를 포함한 제2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꿈꾸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떤 사진 한 장과 문구 때문이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中


그때 나는 회사생활 15년 차였는데,

몸과 마음이 정상은 아니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심지어 누구보다 건강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여름휴가차 떠난 남도여행길

상행선 고속도로에서 시작된 이상 증세는

1년 가까이 나를 괴롭혔다


신호가 오면 손과 발이 저리면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머리는 핑핑 돌고 얼굴은 창백해진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하면서 마치 가슴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비현실감,

잠을 자다가도 심장이 멈출 것 같다는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고 벌떡 일어서는 극도의 불안감,

길을 걷다가 이유도 없이 쓰러질 같은 두려움이

매일 이어졌다


평소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응급실을

제 발로 찾아가길 수차례


대학병원을 찾아

심장, 뇌, 혈관을 샅샅이 검사했다

피를 뽑고, MRI를 찍고, 24시간 부정맥 검사기를 달고


결과는 '이상 없음'


의사들은 정신적 문제 가능성을 언급했고

비로소 증상의 정체를 알게 됐다

'공황발작'


연예인병으로도 알려진 공황장애,

요즘이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도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7~8년 전만 해도 생소한 병이었다


담낭용종도 문제가 됐다

5년 전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 크기가 점점 커져

1cm를 초과해 수술 권고를 받은 상태였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하필 그즈음 가까운 지인의 담낭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손을 쓰지 못할 정도의 상태로 3개월의 시한부 판정이

내려졌다고 했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며

난생처음 응급실을 드나들며

지인의 비보를 전해 들으며


3단 콤보로

죽음이라는 문제가 현실의 언어로 들이닥쳤다


내일 당장 죽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하고 싶기나 할까?

우주의 크기로 치자면 고작 먼지 한 톨도 안 되는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우주의 시간으로 치자면 0.0001초 찰나도 되지 않을 인생을 살면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죽음, 그다음은 무엇이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눈을 감는 그 순간

새로운 세계를 인지하게 될 것이라고


윤회나 환생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생과의 연결성은 전혀 없는

그저 또 다른 주체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죽으면 깊은 잠에 빠지는 것처럼 암흑이 된다는 생각도 동의할 수 없다

암흑을 느끼려면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는 주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세계를 인식하는 상태,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하여

지금 삶은 이번 한번뿐이라는데 동의한다


지금 생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생은

현재의 형태, 현재의 세계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인간으로 살았지만 다음 인식의 상태는 식물일 수도 있고, 미생물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세계를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을 나는 믿는다


죽음의 본질이 그렇다면

무한의 축복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시지프의 형벌처럼 무한의 저주일 수도 있다

근거 없는 낙관도 아니고

대책 없는 염세도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것만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뭘까?


그래,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지.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차분히 앉아서 그것을 정리하고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좋아했지


대학 시절에는

학교 전산망을 이용해 연재소설을 써서

고정 독자도 만들어봤고


직장인 시절에는

조직문화일의 경험을 정리해

투고도 해봤고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은 일, 즐거운 일만 하고 살아도 부족한데,

왜 남이 시키는 일, 남이 그려놓은 길, 타인이 강요하는 것을 해야 할까?


마침내

퇴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4년, 마흔 하고도 여덟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한다

누에고치가 되어 인고의 시간을 견딘다

잔뜩 웅크린 몸체에서 뭔가 꿈틀꿈틀 돋아나려 한다

그것이 화려한 날개가 될지 거추장스러운 사족이 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무엇이든 다시 되돌아가봤으니 그걸로 됐다


이번생의 마지막 순간

그때 그거 해볼 걸

후회로 남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유일하게 의미 있는 건

지금, 여기다


드롭박스 cEO 드루 휴스턴 MIT 졸업식 강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고작 30,000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가만, 지금 내 나이가 마흔여덟이니까 계산해 보면

대략 17,500일 정도를 쓴 셈이다

반도 안 남았지만 한편으로는 반 가까이 남은 거다


그러니

아까울 게 뭔가?

현재 뭘 가졌든

그까짓 거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거다


장자에 이런 말이 있다

'吾喪我' 

나를 장례 지내다


Rest in peace

죽고 나서 편히 쉬라는 건지

평화롭고 행복해지려면 남은 날을 잘 보내라는 건지

Rest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얼마든지 이전의 나를 장례지내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

어차피 창백한 푸른점 위 찰나 같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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