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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일리 Apr 09. 2024

미팅 준비가 제일 어려웠어요

첫 번째 레슨런: 미팅은 아젠다 위주로 컴팩트하게  

한국 대기업 중 하나였던 나의 전직장은 꽤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일단 방송/미디어 업계여서인지 감성적인 사람들이 많았고 (개인적인 경험이다), 조직 위계질서가 명확한 편이었다. 일반적인 대기업보다는 유연하고, 스타트업과 같은 플랫한 조직과 비교하면 엄격한 편이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우리 사업부가 유독 심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경험했던 많은 미팅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었다.


1. 정말 중요한 미팅이라면 시간이 오버되어도 상관 없다. 특히 높은 사람이 주재하는 미팅이라면 더욱. 넘어가는 시간이 10분 미만이면 애교, 사안에 따라서는 30분을 훌쩍 넘길 때도 있었고, 아예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있지 않은 '끝장 미팅'도 더러 있었다. 그 때마다 늘 따라오던 말은, "이거 오늘 안에 꼭! 부러뜨려야 해."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지 않는 한국 정서상, 서두에서 안건과 상관 없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은 후에 30분이 지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30분짜리 미팅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1시간 포맷이었다.

2. 이메일 캘린더는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팅을 잡는 것 자체에도 많은 품이 들었다. 주로 이메일을 자주 썼는데, 팀장 및 담당자들은 수신에, 애매모호한 사람들은 CC에 넣었던 기억이 난다. 오기로 한 사람이 시간에 맞춰서 오지 않으면 찾으러 갈 때도 있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3. 아젠다가 무엇이든, 결국은 그 회의 자리에서 제일 직급이 높은 사람이 더 큰 목소리를 가졌다. 실무자로서 pitch in을 하는 경우는 자주 있었지만, 회의를 소집한 후 회의를 열고,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역할은 상급자가 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의가 진행 됨에 따라 내용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는 것도 대부분 상급자였다. (나와 비슷한 연차의 사람들만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그랬다) 


이런 회의 문화가 익숙하던 나에게, 독일에 본사를 둔 현직장의 미팅 문화는 꽤나 색다르게 느껴졌다. 

1. 중요한 미팅이어도 다음 일정이 있으면 마친다. 이번 미팅에서 원래 다루고자 했던 내용의 50%밖에 커버를 못 했다고 하면 다음 미팅 때 나머지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후속 미팅을 잡는다. 만일 데드라인과 결부된 미팅이라면 후속 미팅을 잡을 때 참고한다. 아이스브레이킹은 짧게 한다. 

2. 미팅을 잡아도 되는지 이메일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 미팅에서 "A씨, B씨, C씨, 저랑 이번 주 내로 해당 내용 논의하시죠"라고 언급까지 있었다면,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캘린더로 초대장을 보낸다. 만일 새로운 내부 관계자와 새로운 토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하면 Slack으로 배경 설명을 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한 후 미팅 초대장을 보낸다.    

3. 아젠다를 잘 아는 사람이 대화를 주도한다. 물론 독일 회사에도 위계질서의 개념은 있다. 하지만 위계질서가 발휘될 때는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때 정도이지, 매일같이 일어나는 미팅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등한 발언의 기회와 무게를 가진다.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일단 한국 회사에서와 달리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이 피부로 다가 오기 때문에, 미팅은 최대한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정말 운이 좋아서(?) 참석자 모두가 추가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하더라도, 계획 된 시간만큼 진행을 하고 끝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더불어 내가 소집한 미팅은 내가 주재해야 되기 때문에 (때로 중요한 결정은 프로젝트의 스폰서들이 하더라도) 결국은 내가 소집하는 미팅마다 실력과 밑천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제약들 때문에 내가 준비가 되었으면 미팅은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주재하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나는 팀장님과 공동창업자가 프로젝트의 메인 스폰서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인지,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상황일 때도 facilitate하는 선에서 그쳤던 적도 있었다. 은연 중에 그들은 갑이고, 나는 이 프로젝트를 굴러가게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enabler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수동적인 자세다. 꼭 독일 회사뿐만 아니라 어떤 회사, 어떤 조직에서 미팅을 하는 상황에서도 "저 사람이(상급자) 알아서 주재하고 정리하겠지. 나는 어차피 발언권도 없을 테니까."라는 생각은 좋지 않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미팅에 들어갈 때 꼭 다음을 유념한다.

1. 이 미팅의 목적은 무엇인가

2. 내가 이 미팅에서 참석자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인가 (세 가지 키 포인트 등)


지금도 미팅 준비가 어려울 때가 있지만, 이 두가지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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