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교수에 따르면 케타민’은 기쁨을 느끼는 것을 억제하는 뇌 부위인 ‘외측고삐핵’의 활동을 억제하는 성질이 있다. 외측고삐핵은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완전히 우울증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의 외측고삐핵 활동을 관찰하면 마치 기관총이 총알을 발사하듯 신경 활성 그래프가 그려진다. 케타민은 외측고삐핵 뉴런의 신호 전달을 차단하며 이런 외측고삐핵 신경 활성을 억제한다.
후 교수는 “뇌의 시상상부에 위치한 외측고삐핵은 우울증 환자에게서 비정상적으로 지나치게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진 영역”이라며 “현재 동물용 마취제로 쓰이는 케타민이 마치 기관총처럼 터지는 외측고삐핵의 비정상적인 과활성화를 잠재운다”고 했다."
출처: 동아사이언스 2019년 9월 25일자 기사
이것이 오늘날 대중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까지 유일하게 진리인 "과학적인" 이해 방식으로 여겨지곤 하는 타입의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라는 말은 오늘날 흔히 "진리"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무엇이 어떠하다고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라고 쓰면 곧 '무엇이 정말로, 진짜로 어떠하다고 밝혀졌다' 는 뜻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과학"은 대중의 머릿속에서 시험관, 현미경, MRI 사진, 복잡한 수식, 그런 것들의 이미지가 뭉쳐져 물신화 되어있는 표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주 애지중지하며 기르던 개가 있는데, 이 개가 20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개 주인은 극도로 우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이 상황도 기사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쁨을 느끼는 뇌 무슨 부위의 활성화 정도가 극단적으로 낮아졌으며, 기쁨을 느끼는 것을 억제하는 뇌 무슨 부위가 매우 활성화 되었고...
자, 이 사람이 우울한 원인은 사랑하는 개가 죽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뇌의 무슨 부위 무슨 부위가 활성화 혹은 비활성화 되었기 때문일까요? 답은 '관점에 따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저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서술만이 진정한 진리로 여겨지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개가 죽어서 우울해졌다, 라는 서술도 일종의 진리이긴 하지만 "과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이런 "비과학적" 진리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게 "과학"이라는 물신이 빚어내는 효과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나', '사랑하는 개', '죽음' 등등 무수히 많은 기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상징적 차원에서 가능한 인간의 삶에 대한 사고들, 그리고 성찰들은 더이상 돌아볼 가치가 있는 진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왜? "과학"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기사에 나온 것과 같은 연구들이 앞으로 더 많이 진척되어 여러가지 심리적 문제들을 약물이나 외과적 조치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20년간 함께한 사랑하는 개를 잃고 실의에 빠진 사람의 뇌의 무슨 무슨 부위를 요렇게 조렇게 건드려 더이상 우울하지 않게 만드는 게 가능해 진다면 정신분석이 다루는 상징적 현실, 내면의 세계와 같은 건 더더욱 외면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징적 현실, 내면의 세계 같은 것을 외면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달리기 선수가 우울함으로 인해 기량이 떨어졌다고, 그리고 떨어진 기량으로 인해 더더욱 우울해 졌다고 합시다. 이 사람의 뇌의 여기랑 저기를 물리적, 화학적으로 건드려 기분을 호전시키고 기량을 원래대로 되돌린다고 합시다. 놀라운 의술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걸까요? 달리기 선수의 달리기 기량이 떨어졌는데 그게 근육이나 뼈의 문제같은 기계적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서 기인한 문제이더라도 기계적 접근으로 문제를 '처리'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걸로 '모든 게' 오케이라면, 그 선수의 삶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달리 말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어떤 경위로 그를 우울증으로 이끌었는지, 그 사람에게 달리기 실력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그런 질문들은 사라져도 괜찮은 걸까요?
회사원들의 근무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 집중력 향상 훈련이나 약물 조치를 시행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회사원들의 업무 효율이 실제로 좋아졌고, 그래서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헌데 이런 종류의 기쁨은 인간 회사원들보다 일 잘 하는 로봇이 개발돼 그것을 인간 회사원 대신 채워넣어도 마찬가지로 얻어지는 기쁨일 것입니다. 여기서 기쁨을 느끼는 저 사람들은 누굴까요? 답은 회사가, 회사원들이 잘 작동함으로써 더 원활하게 이익을 얻게되는 이들이겠지요. 이들의 기쁨은 회사원들의 업무 효율 저하로 인해 방해받습니다. 직장인들의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배우자와의 갈등 때문에, 자식이 속을 썩여서,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즉, 그들의 삶이 많은 어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업무 효율과 이윤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란 것은 그저 귀찮은 방해물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이해관계의 차이가 서로 다른 사람들 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내가 더 예뻐지기만/잘생겨지기만 한다면 나는 괴롭지 않을텐데" 라고, "내가 공부를 더 잘 하기만 한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텐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서 예뻐지는 수술을 받거나 공부에 집중을 잘 하게 해 준다는 약을 먹거나 할 수 있죠. 세상엔 안 예뻐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왜 나는 예쁘지 않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공부를 못 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도 많은데 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고민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소위 과학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은 가면 갈수록 더 노련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이런 차원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이런 차원, 제가 삶이라 칭한 그런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것은 멜랑콜리한 감상에 젖기 좋아하는 문학가들이나 중요하다고 부르짖는 것이지, 사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우울감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같은 약, 머리가 씽씽 돌아가게 하는 신기한 약, 예쁘고 멋있게 만들어주는 성형수술 같은 게 필요할 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확실하게 단언하진 못하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