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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Mar 07. 2024

우리가 양복을 입음의 의미

한반도에 서양식 복식이 들어온 지도 오래되어, 오늘날 한국인들은 더 이상 내가 먼 곳의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의복 양식을 따라 입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죠. 이제 서양식 복장이 우리에게 보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식 복장은 저 옛날 조선 말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에겐 분명 새롭고 희한한 외국 문물이었습니다. 그때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 우리 선조들에게는 세월에 따른 변천을 포함하여 그들이 입어오던 나름의 의복 양식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의복 양식과 조선 후기의 의복 양식 사이의 차이가 내재적 연속성을 유지한 채로 점진적으로 변화한 결과라면, 서양 복식의 도입은 원래 있었던 것이 변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을 발본적으로 제거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것을 새로 도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전면적으로 이루어져, 되돌아가는 일 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그리고 그 변화 후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지금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양복 도입의 본격적인 시작은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대한제국 황제입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서양식 군제를 도입하면서 서양식 군복도 같이 들여왔습니다.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 의하면, 1895년에 제정된 대한제국 군복은 독일식 군복의 형태를 따랐다고 합니다.


프로이센 (현 독일) 보병대 소위 제복.

(위 사진 출처)

대한제국 근위병의 모습.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프로이센 보병 장교의 제복과 대한제국 근위대의 제복이 확실히 비슷하게 생겼죠?

이때 황제의 기본 예복은 조선의 곤룡포에 약간의 변화만 준 정도였지만 (제후국 왕의 복장에서 제국 황제의 복장으로), 국군의 대원수로서 황제가 입는 옷은 서양식으로 갖추게 됩니다.

고종이 입은 대원수 예복.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대원수 예복을 입은 고종과 원수 예복을 입은 순종.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위 사진에 등장하는 모자의 재현품.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위 모자는 프로이센에서 사용하던 투구와 굉장히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프로이센의 투구.

(위 사진 출처: Museum-digital Rheinland-Pfalz)


1907년 강제 퇴위 이후 태황제 예복을 입은 고종.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황제가 입는 대원수복을 포함한 군복들이 서양식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위 관료들의 제복도 서양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남성들이 양복을 착용한 것은 관복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개혁은 1884년에 있었던 갑신의제개혁이었으나 당시에는 잘 시행되지 않다가 10년 후인 갑오개혁 때 다시 간소화가 시도되었다. 즉 1896년 4월에는 구미식 군복으로 육군복장규칙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8월 1일에는 문관복장이 간소화되어 반포되었다.
1899년에는 외교관의 복식을 양복화하였으며, 1900년에는 문관복장규칙이 발표되어 문관의 예복으로 양복을 입게 하였다. 이때 반포된 문관예복은 영국의 궁중예복을 모방하여 만든 일본식 예복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양복 (洋服)" 항목에서 발췌.  
1900년 반포된 문관복장규칙에 따른 1등 칙임관 대례복.

(위 사진 출처: 연합뉴스)

1등 칙임관 대례복을 입은 이범진.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수염도 서양식으로 다듬었네요.
2등 칙임관 대례복을 입은 김가진.

(위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1900년에 문관복장규칙이 반포돼 위와 같은 서양식 문관 복장이 공식적으로 도입되고, 1906년에 칙령 제75호 문관대례복제식개정에 따라 복장이 바뀌게 됩니다.

1906년 의정부 칙령 18권에 수록된 대례복 도안.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한국맞춤양복협회에서 소장 중인 1906년 칙령에 따른 문관 대례복.

(위 사진 출처: 연합뉴스)

1906년 제정된 궁내부 주임관 대례복.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모자의 태극무늬를 빼면 확연한 프랑스 옷이지요.
1907년 덕수궁 중명전 앞에서 찍은 영친왕과 대신들의 사진. 문화재청에서 간행한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관 2018년 특별전 "대한제국 황제복식" 도록에서 발췌.

비슷한 시기 보통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여전히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그런 조선의 의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04년 숭례문 앞 풍경.

(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02년 찍힌 남자들의 사진.

(위 사진 출처: 동아일보)


즉, 서양식 옷은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부터 도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세기말에는 단발령에의 반발 등 변화에 저항하는 민심도 있었지만,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서양식 옷의 도입 물결은 대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옷을 입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잊히기 쉽지만, 무엇을 입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는 통상적으로 입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저항감의 크기를 통해 가늠할 수 있습니다. 독자께서 남성이라면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하는 상상을 해 보세요. 별다른 심리적 저항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옷은 단순한 미적 요소, 보온용 기능적 장치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황제와 관료의 복장을 왜 갈아치웠을까요? 실제로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의 옷이야 실용성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황제는 전장에서 뛰어다닐 일이 없으며, 그가 입는 옷은 순전히 상징일 뿐입니다. 문관의 옷도 실용적인 의미에서 바뀐게 아닙니다. 글씨 쓰는 편리함이라면 옷소매 통을 줄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게 중요했다면 이미 조선시대에도 통을 줄였겠죠. 이러한 옷의 전환은 실용적인 일이 아니라 상징적인 일입니다.


제정국가에서 곧 국가의 상징인 왕의 옷이 바뀌는 것, 정부 고위급 관료들의 제복이 바뀌는 것은 특히나 더 상징적인 일입니다. 이는 국가의 향방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바뀐 걸까요? 바로 서구 열강의 우월함을 진심으로,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들을 좇게 된 것이지요. 그들이 우리보다 현저하게 우월하므로, 그들을 좇아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고, 공식적 의복을 독일식, 프랑스식 등으로 바꾼 것은 그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일은 조선에서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네, 다들 아시다시피 바로 옆나라 일본에서 조금 더 일찍 일어났지요.


메이지 유신을 묘사하는 그림이라는 헌법발포약도. 1898년.

(위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그림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서양식 옷을 입고 있고, 머리모양과 수염도 마치 서양인처럼 하고 있습니다. 신체비율마저도 서양인처럼 묘사되었죠. 이 그림에 등장하는 고위 관료의 옷이 위에서 본 칙임관 대례복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도 아편전쟁 때 동방의 패자였던 청나라가 영국에서 초장거리의 대양을 건너 파병한 약간의 해군에게 모래성 무너지듯 처참하게 털리는 모습을 보았고, 이후 여러 서구 열강들의 불평등 조약 강요에도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서양이 막강하며, 살아남으려면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겠지요.


조선의 경우에도 신미양요나 병인양요를 겪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랬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으로 표상되는 쇄국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이후 서양을 먼저 따라 하기 시작한 일본의 힘도 막강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우리도 역시 서양을 좇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힘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당연하게도 고위 관료들 사이에만 머물지 않았고, 민중에게도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민중들의 의복은 원래 상류층을 좇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산계급은 부를 차지한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부러워하고, 그걸 따라 하려고 했지요. 뒤집어서, 어떤 사람들을 선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들의 옷차림을 따라 하는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산계급 사람들은 부유한 귀족계급을 선망하여 그들을 흉내 내고 따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시골, 촌 등의 양식은 따라 하고 싶은 무언가가 아닙니다. 촌의 것은 "촌스럽"죠. 서양식 옷의 일반화는 조선식 옷이 촌스러운 것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가난함, 힘없음, 시골과 연상되고, 서양이 부유함, 강대함, "서울"과 연상됐기 때문일 것이고요.


이때 만약 내가 상대와 기본적으로 대등한 위치라 여겼다면, 어느 날 갑자기 상대를 멋지다고 느끼고, 상대를 따라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신라에게 멸망당한 백제의 귀족 가문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신라 귀족의 스타일을 따라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직 백제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남아있던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혼내면서 "너는 백제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느냐? 신라인들 옷이 그렇게 좋아 보이더냐? 창피한 줄 알거라!"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애초에 나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런 종류의 자존심이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이 서양의 옷을 입은 것은, 그들이 서양을 우월한 문명으로 인정하고, 동경하고, 그래서 따라 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옷과 고위 관료들의 옷을 모두 서양식으로 바꾼 것은 자존심 상함을 느낄 수 없는 정도의 격차가 확실하게 인지되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서양식 옷을 입다니, 너는 자존심도 없냐?" 같은 소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최초로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가 희한하게 생긴 외국식 옷을 입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는 서양식 옷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내가 외국식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격식을 차리기 위해 서양식 정장을 입어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는 도포와 갓을 갖추어야 격식에 맞고 예절에 어긋나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그 자리에서 서양식 정장을 갖추어 입어야 격식과 예절에 맞게 되었구나.'


외국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때로는 외부에서 이런 생각을 촉발하는 자극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너희 나라에서는 결혼할 때 어떤 의상을 입니?" 같은 질문을 받을 때이지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자는 유럽에서 비롯된 하얀 신부 드레스를 입고, 남자는 유럽식 정장을 입는다'입니다.


물론 우리는 옛날식 우리의 옷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때도 폐백 할 때나, 기념촬영 할 때는 조선시대 의상을 입기도 하지요. 명절 때도 조선시대 양식의 옷을 입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일상과 함께 살아 숨 쉬는 옷이 아니라, 화석처럼 보존된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마 그것이 조금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한반도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유한 것에 충분한 자긍심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요. 한반도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이 수백 년간 입어오던 양식을 버리고 서양식 옷을 입는다는 사실은, 한반도 사람들이 서구 양식이 더 멋지고 세련됐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니까요. 서구 문명∙문화가 더 멋지다는 감각은 깊게 뿌리를 내려,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스토랑은 고급지고, 식당은 평범하다는 느낌, 유럽 스타일은 고급지고, 한국식은 촌스럽다는 느낌, 그런 것들이 거기 포함되겠죠. 아파트 이름을 서양식으로 짓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고요.


제가 자존심이 상했던 이유는 당연히 제가 저 자신을 한반도 사람으로, 한반도에서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문명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그 문명과 저를 동일시했기 때문일 겁니다. 한반도 문화의 서구 문화에 대한 패배(?)를 저의 패배로 느꼈던 거겠지요. 약간 아쉬운 마음은 흔적처럼 남겠지만, 이것을 자각한 이후로는 나를 한반도 문명과 동일시하는 대신 양자 간에 거리를 두고, 나를 그냥 별개의 개인으로 보면서 (물론 내가 거기서 자라면서 받는 영향들은 내 안에 계속 머물겠지만) 그냥 서양식이든 조선식이든 내 취향껏 고르면 그뿐이겠지, 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면 예컨대 누가 "한국, 일본 등 대표적인 동아시아 국가에선 왜 격식을 갖출 때 유럽식 정장을 입지?"라고 물어도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 없이 "옛날에 서양 문명이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인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었을 때,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서양을 따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수용됐고, 그래서 전면적으로 서양 문물을 도입한 결과 그렇게 됐어"라고 설명해 줄 수 있겠죠.


저는 한반도 의류 양식이 꾸준히 이어지고, 개량을 거쳐 오늘날에도 평범하게 입어지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원래 문화란 늘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게 마련이긴 합니다. 한반도 사람들의 의상도 때로는 중국 양식의, 때로는 몽골 양식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왔습니다. 사실 조선시대 관복은 명나라 것을 거의 그대로 베낀 형태지요. 마찬가지로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도 변화할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변화가 아니라 제거였죠. 만약 우리가 여전히 한반도 나름의 양식을 이으며, 또한 변화하며 전해져 온 모종의 옷 양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입으며 살고 있었다면 참 멋진 일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동일시가 아주 없어지진 않았나 봅니다. ㅎㅎ)


몇몇 의류 제작자들이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양식이 들어가면서 동시에 현대적 섬유로, 실생활에서 입을 수 있을 만큼의 편리함도 가진 그런 옷들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십수 년 전 그런 제작자들 중 하나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에 한복 스타일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보기에 한복이 예뻐서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우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런 업체와 옷이 더 많아지고 보편화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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