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긴장 조금, 설렘 가득
2023년 1월 17일 밤 10시경 멜버른행 항공권을 구매했다. 지난 몇 년간 수 없이 미루고 미뤘던 멜버른 여행. 2016년 한국 귀국 후 몇 년간은 단 한 번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서 호주의 낮은 하늘과 푸른 자연은 가끔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작년 12월에 멜버른에서 첫 조카가 태어났고, 그때부터 급격히 더 방문하고 싶어졌다. 지난 몇 년간 멜버른에 가지 못했던 건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생겼을 땐 돈이 없었다. 첫 직장을 퇴사하고 실업급여를 받을 땐, 재취업에 대한 압박이 너무 강해서 차마 여행을 갈 생각을 못했으며, 두 번째 퇴사 후에는 코로나도 문제였지만 내 알량한 자존심이 날 멈칫하게 했다.
미래를 향해서 발전하고 있는 친구들과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서 제 몫을 잘해나가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뤘더니 실업급여 수급기간도 끝이 나고 오히려 지금, 더더욱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을 때 여행이 결정되었다. 물론 항공권은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고, 부모님이 멜버른에서 조카를 돌봐주고 있는 지금이 시기적으로 적당하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11월에 낯선 호주 땅을 밟았던 게 엊그제 같다. 그렇게 2년 계획이었던 유학생활은 이런저런 이유로 10년을 훌쩍 넘겼었다. 11살. 세상 물정 모르던 아이의 청소년 시절이 고이 담겨있는 곳에 30살의 내가 가면 어렸을 때로 돌아갈까? 아니면 20여 년 전과는 다른 좀 더 성숙하고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새로운 이치를 깨우치고 성장하게 될까.
솔직히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는다. 멜버른을 한 달간 다녀오면 내 통장 잔고는 아슬아슬해진다. 사막 한가운데서 500ml 생수 한 병으로 한 모금씩 아껴 마시다가,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며 갈증을 속시원히 해결할 만큼 한 번에 물을 다 마셔버리는 기분이다. 평소 나의 성향으로서는 정말 기겁할 일이다. 그런데 나이 앞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일단 질렀다. 여전히 욜로는 지양하는 겁쟁이지만 한 달 후에는 조금은 더 대범한 내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이번 여행은 추억여행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까지 살았던 동네랑 학교도 방문하고 싶고, 나의 대학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티도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다. 하지만 오빠가 시티에서 꽤 멀리 살고 있어서 얼마만큼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현재 오빠네는 조카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기에, 우리 귀한 귀공자님의 루틴에 맞춘 여행이 되겠다.
서울 자취방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 계절의 옷을 모두 본가에 내려보낸다. 그래서 여름옷 역시 불과 한 달 전에 본가로 보낸 옷을 다시 가지러 다녀왔다. 그것도 귀성길 정체가 가장 심한 설 연휴에 왕복 11시간 이상을 고속도로에서 보내면서... 나한테 비싼 옷도 없어서 그냥 저렴한 여름옷 몇 벌 새로 사는 게 더 이득일 수 있지만, 설 당일에 성묘 간다는 사촌오빠 말에 나도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따듯하게 맞이해주고 싶으셨는지, 서울이 한파로 추위에 떨 때, 조부모님의 산소는 따듯한 햇살과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코 끝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어떤 연예인은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에 향수를 꼭 하나씩 산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 내내 그 향수만 사용한다고 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그 향을 맡으면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된다는 인터뷰 내용에 나도 따라 해보고 싶었다. 현재 호주는 여름이니까 산뜻하고 쿨한 향을 찾아봤고, 면세찬스를 위해서 평소 가격대가 높아서 부담되었던 브랜드 위주로 찾아봤다. 그리고 40% 할인을 하고 있는 톰포드 네롤리 포르토피노로 결정했다. 시향 해본 적 없는 향수를 구입하는 건 위험부담이 있지만 올해는 다양한 모험 좀 해보지 뭐.
그리고 해외여행 자체도 6년 만이라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건 10년 넘게 사용한 수명이 간당간당한 (바퀴 둘 중 한 개는 고무 부분이 다 닳아서 플라스틱 중심부가 드러나있다) 기내용 케리어 하나밖에 없어서 이번 기회에 수화물용 케리어도 구매했다. 쉴 새 없이 돈을 써대는 걸 보니 정말 여행을 가나보다.
멜버른행이 결정되고 항공권 구매하기도 전에 멀티 어댑터 플러그.. 일명 돼지코를 주문했었다. 물론 오빠 집에 여유분이 있겠지만 그냥 앞으로도 여행의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는 부적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갑자기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출국에 긴장도 되지만 솔직히 설레는 감정이 대부분이다. 부디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그동안의 무기력함을 떨쳐내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