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만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내 시간과 노동력을 내어드리지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부모님 지인 분이 데려간 공중파 음악방송 리허설에서 봤던 장나라 님은 내가 처음 실물로 본 연예인이다. 추운 날씨에 건물 밖에서 길게 줄 서있던 팬들을 지나쳐 프리패스로 방송국을 입장했을 때 받은 곱지 않은 시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노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2003년도쯤이었으니 '나는 여자랍니다'로 활동할 때였을지도. 그러고 몇 명 더 리허설 무대를 봤는데 너무 어렸을 때라서 아쉽게도 누군지 몰랐다. 그래도 그 당시에 멀리서 바라봤던 장나라 님은 인형 같았다.
지방에서는 연예인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요즘도 그렇지만 20여 년 전에는 지방에서 다양한 문화생활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연예인이란 존재는 늘 내게 환상 같은 존재였다.
호주에서 대학교 새내기 생활을 맘껏 즐길고 있을 때 친구가 콘서트 스태프로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무보수였지만 평소에 좋아하던 아티스트고 무엇보다 꽃미남 밴드로 유명했었기에 당장 하겠다고 했다. 콘서트 전날에는 설레어서 잠도 설쳤다.
아침 7시 반까지 공연장에 집합했다. 하지만 기획사 직원 분이 나와 친구를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고 보니 이미 자원봉사자 수는 다 채워졌는데 담당자의 실수로 우리에게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 어차피 일당 주는 일도 아니었고 도시락도 많이 남으니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리에게도 스태프 티셔츠를 나눠줬다. 조금 께름칙한 시작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집으로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콘서트는 저녁 7시 시작이지만 이미 해뜨기 전부터 담요와 방석으로 무장한 해외 팬들이 건물벽에 기대어 차가운 바닥에 줄지어 앉아있었다. 스탠딩 표라서 먼저 입장하기 위해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온전히 받으며 열심히 짐을 날랐다. 나를 붙잡고 아티스트가 도착했냐고 수시로 묻기도 했고, 아티스트에게 전해 달라는 선물을 손이 모자랄 정도로 계속 받았다. 팬심이란 정말 대단했다.
대기실과 백스테이지에서 아티스트를 계속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쉴 새 없이 온갖 장비와 짐을 옮기고, 대기실에 물과 음료, 간식류 세팅은 아티스트가 도착하기 전에 끝내야 했다. 아티스트가 도착하고서는 매니저와 소속사 직원분들이 중간다리가 되어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고서는 주로 "No camera please"를 외치며 영상과 사진을 찍고 있는 팬들에게 다가가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2층 좌석에 어떤 중년 남성분이 너무 당당하게 무대를 촬영하는 모습을 포착했고 바로 제지하러 다가갔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그분은 아티스트를 불러들인 주최사 사장이었고 카메라를 내리지 않았다. 솔직히 고용된 전문 촬영 기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팬들 사이에서, 그것도 2층 가장 명당에서 당당히 혼자서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콘서트가 끝나고 대기실에서 한인 라디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동시통역을 해줄 사람을 찾았다. 지금에서야 그때 용기 냈어야 함을 후회하지만 막상 내가 하겠다고 나서기가 무서웠다. 혹시 내가 말을 버벅대거나 제대로 통역을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 친구가 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는 얘기지만 인터뷰 스크립트도 있었고 내용도 일상적인 대화라서 어려운 부분이 없었다고 했다. 하... 용기 낼걸...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통역자를 현장에서 그렇게 구하러 다닐 수 있는지 주최사의 허술함에 놀랍긴 하다. 그리고 단 한 푼도 안 주고 연예인 보고 싶어 하는 한인 대학생들 이용해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 것도 경악스러울 일이다. 여담이지만, 몇 년이 지나고 한국에서 한참 면접을 다닐 때, 이 회사에서 일했었던 지원자를 만날 수 있었다. 면접장을 나와서 엘리베이터에서 짧게 나눈 대화가 끝이었지만 그 회사의 악명은 여전했다고 한다.
아무튼, 무보수였지만 좋아하는 연예인 하고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하지만 단체 사진만 찍고 끝이 났다. 아쉬웠지만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였고, 숙소 로비에 종이 맡겨두면 사인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마저 소통의 오류가 생겼는지, 사인을 받은 이는 없었다.
분명 교통비조차 지원해주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연예인을 보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으며, 콘서트의 그 벅차오르는 분위기를 좋아했기에 이후 몇 번 더 스태프로 일했다. '쓸만한 인력 풀(일명 호구)'에 올랐는지, 멜버른 콘서트 때마다 연락이 왔었다. 한국에 귀국해서 더 이상 못한다고 전달했음에도, 회전문 같은 퇴사율에 몇 달 후 다른 직원의 연락을 또 받았었다.
첫 번째 콘서트 이후로는 단체사진조차 허용하지 않았기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와 사진 한 장을 못 남긴 게 너무 아쉽다. 조용히 사진 요청을 시도해 볼 만도 했지만 당시 공연장 시설이 너무 미흡해서 아티스트들의 예민함이 극도로 높았었기에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나머지 멤버들을 다독이던 진정한 리더의 모습에 한 번 더 반했고 지금까지도 멀리서 늘 응원하고 있는 수많은 팬 중 한 명이다. 그나마 음향감독님 통역을 맡아서 잠깐이나마 아티스트들하고 가까이서 대화했다는 걸 위안을 삼아 본다. 아직까지도 내게 몇 안 되는 인생 모먼트 중 하나다.
스태프로 일하면서 짐 나르는 일반 단순 노동부터 티켓 배부, MD 판매, 통역 등의 업무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확실히 현장 경험이 쌓이다 보니 위기 대처 능력이나 순발력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게 되었음을 자부한다. 그리고 분명 좋은 자양분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이라면 정말 정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더라도 20살 때처럼 무보수로 일을 할 것 같진 않다. 단 둘이 셀카도 찍을 수 있고 이에 상응하는 솔깃한 제안이 있다면 고민은 해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재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남의 노동을 쉽게 여기지 않다고는 하지만, 앞으로는 연예인 보고 싶은 순수한 학생들의 마음을 악용하지 말고 적은 금액이더라도 어느 정도의 페이는 지불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무보수임을 알고 지원한 나지만 적어도 교통비 정도는 주면서 그렇게 일을 시켰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대학생 때 넘치는 체력으로 콘서트의 열기와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