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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May 05. 2018

도시의 거리에 비가 내릴 때

현대라는 상처

거리에 비 내리듯

내 가슴에 눈물 내리네

이 울적함 무엇이기에

내 가슴 깊이 스며드나?     

땅에 지붕 위에

오 포근한 빗소리여!

울울한 마음을 위한

오 비의 노래여!     

내키는 것 없는 이 가슴에

까닭 없이 눈물 내리네

무어라고! 돌아선 것은 없다고?...

이 슬픔은 까닭이 없네.     

가장 몹쓸 아픔은

웬일인지 모른다는 것

사랑도 미움도 없이

내 가슴이 그리도 아프네!  

   

- 폴 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     

  

19세기 프랑스의 한 시인이 쓴 이 유명한 시에서 ‘내 가슴에 내리는 눈물’은 ‘비’에 비유된다. 바꿔 말해, 비가 내릴 때 내 가슴에 눈물도 내린다. “까닭 없이” “사랑도 미움도 없이” 눈물이 내리는 까닭은, 비가 내릴 때면 늘 내 가슴의 “슬픔”이 자동적으로 자극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상의 메마름을 해소하고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자극하는 요인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와 내 가슴의 “아픔”이 갖는 이 예민한 연관성이 자연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살던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가 "까닭 없이" 가슴의 상처가 되는 이 반응은  “거리에 비 내리듯” "내 가슴에 눈물이 내리는" 감성 코드를 지녔다. 이 비는 '거리' 즉, 도시라는 현대적 시공간의 탄생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비다.



도시의 출현과 더불어 생성되기 시작한 현대라는 시간은 전통적 농경 세계와는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풍경은 객관적으로 투명한 물상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물리적 심상이다. 19세기의 시인은 이 풍경에서 직관적으로 새로운 발견을 한다. 시인은 ‘거리의 비’에서 “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감수성을 포착함으로써, ‘비’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내고 전통사회로부터도 분리한다. 시인은 비가 내리는 이 풍경이 이제 더 이상 예전 시간에 속하지 않음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그것은 대기환경의 변화라기보다는 그 환경 속에 내던져진 사람, 즉 비를 맞거나 비를 보는 사람의 감성이 옛날과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비는 ‘거리’의 비, 도시의 비다. 비는 ‘도시인’의 감성을 예민하게 건드려서 종래와는 다른 화학적 심리운동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도시의 거리, 도시의 삶에서는 ‘비’ 하나만으로도 사람들 각자가 지닌 내밀한 상처가 환기된다. “까닭이 없”다는 것은 상처의 내밀성으로 인해 상처가 자기도 기억 못 할 만큼 “내 가슴 깊이 스며”있다는 뜻이지, 상처가 뜬금없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몹쓸 아픔”이란 아픔이 날카롭고 깊숙하다는 이다.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정신의 여유와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을 허락하지 않는 도시는, 농경사회보다 훨씬 더 신경증적이다. 현대적 도시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얼굴 표면을 보여주지만, 그만큼 심리적 층위는 복잡해지고, 정체성은 분열되며. 개인들의 의지는  타인들의 의지와 충돌하면서 분할된다. 거기에서 '현대적' 상처가 생긴다. 도시의 얼굴이 그 표면을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세련된 문명시스템이 억압의 기제를 강력하고 정교하게 동원하기 때문이지 인간에 대해 관용적이서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문명은 정교화될수록 그래서 더 불만스럽다.


도시의 비는 밤에 돌아오는 꿈의 이미지가 불가피한 것처럼   도시인들로 하여금 울컥울컥 가슴 위로 솟아오르는 예민한 상처들을 불러일으킨다. 비가 내릴 때 개인의 내밀한 상처들이 대기와 얽혀 솟아난다는 것은 도시인들 전체가 결국 상처를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도시 자체가 상처다. 이 ‘까닭 없는 슬픔’은 비의 시간이 이제 도시적 시간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도시의 시간이란 이 복잡한 공간의 거주자들의 숨겨진 상처들을 과잉억압하고 기워냄으로써 유지되는 복합적인 것이다.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 이성복, 「비1」     


20세기가 되었으나, 창가에 부딪히는 한밤중의 빗소리는 그래서 ‘당신의 울음’ 소리처럼 들린다. 20세기야말로  도시의 시대가 아닌가. 비는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포석을 치고” 결국 “담벼락을 치고” “창문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온몸을 적”신다. 비는 밖에서 내리지만, 젖는 건 “온몸”이다. 비는 자연의 시간에 속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으로 인간의 감성 내부로 깊이 들어온다. 어떤 만남과 헤어짐, 누군가와의 피치 못한 이별의 기억은 삶의 현실에 내재한 치명적인 상처며, 우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다.

 


여기서 진정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비가 아니라 “당신”이며, 넘은 것은 “창턱”이 아니라 내 가슴일 것이다. 당신의 울음소리로 바뀌어 “창턱을 뛰어넘어” 내 방으로 난입한 비는 역시 전통 사회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도시에 속한 것이다. 이 빗소리-울음소리에 깃든 아픔은 도시인의 기본 존재 조건인 고립과 고독 속에서 만남의 엇갈림이 더욱더 불가피한 것으로 심화되는 소외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비 내리는 밤은 고통스럽게 창을 두드리는 “당신”을 나와 생생하게 마주하게 하는 감성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삶의 고독을 더욱더 몸서리치게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아, 저, 하얀, 무수한, 맨 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 황인숙, 「비」     


도시에 비가 내릴 때 시인은 거리에서 “찰박 찰박 찰박”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터벅터벅 운동화 소리도 아니고, 또깍또깍 구두 소리도 아니다. 물기 어린 바닥과 맨발이 만나는 소리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도시에 "무수한" "맨발들" "맨종아리들"이 걸어 다닐 일이 없다.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빗방울과 아스팔트나 시멘트 바닥일 것이다.  이 빗방울을 시인은 맨발이라 얘기하고 있다.


이 맨발 소리는 비를 매개로 ‘신발’ 없이 육체가 세계와 만나는 소리다. 도시의 빗소리는 생활의 필요 속에서 무장했던 구두 속 들리지 않던 ‘맨발’ ‘맨 살갗’의 소리를 들리게 한다. “티눈 하나 없는/작은 발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던 망각했던 감성을 촉발시킨다. 내 안에 있는, 그리고 세계의 어떤 예민한 소리를 듣고 우주의 기미를 감지하는 감수성이 일시적으로 회복된다. 이 감성은 도시인의 ‘가슴’에 내재한 아픔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갑옷 같은 것으로 감싸고 있던 생활인의 상투적 인지체계를 스르르 해체하는 시간을 선사함으로써 도시인의 무딘 감각을 깨운다. 비가 내리는 날은 죽었던 ‘맨발’의 감성이 다시 살아나는 마법의 시간이기도 하다.


맨발의 감성은 ‘살아 있음’의 감각이다.  우리가 ‘생물’인 이상 이 감성은 필수적이다.    

    





* cover image by Mike Barr

** 폴 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 번역 황현산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의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실험적 융합대안대학을 설계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고전 과목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연구디자인센터(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연구기관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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