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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May 06. 2018

한때

행복에의 몰입


한때는 앞뒤 시간이 없는 매혹의 절단면


‘한때’는 봄의 시간이다. 마른 대궁이에도 물기가 생기고 죽은 가지에도 새순이 돋는 시간. 사위는 푸르러진다. 공기는 안온하고 빛은 싱그럽다. 자연에 속한 모든 것은 겨울을 겪는다. 그러나 봄에 다시 겨울을 잊는다. 이 망각은 정신의 나태함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감각의 충실성에 따른 결과다. 꽃이 막 피려는 순간, 혹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엽록소를 빨아들여 순식간에 청록빛으로 물들어가는 몸, 안온한 공기에 도취된 물기 어린 육체는 그 감각 안에서 온전하다.


이 감각적 충실성 안에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은 없다. 이 망각은 나약함이나 방만함 때문이 아니라, 앞뒤가 가파르게 절단된 시간에서 온다. 현재에 몰입된 절단면에 과거 회상과 미래에 대한 기대나 계산은 없다. 절단이 시간을 순환시키지 않고 정지시킨다. 하지만 이 정지는 정체가 아니라 충만이며 매혹이다. 그러므로 바람의 움직임, 미세한 숨소리, 공기에 실려 오는 먼 곳의 사람 기척과 살 냄새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하여 모든 신경이 오직 이 한 순간에만 모이게 되었다고 하여 무슨 큰 잘못이겠는가.

 


어린 시절 창경원에는 정오가 되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 시각에 맞춰 부채 모양의 날개를 펼치는 공작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일찍 그곳에 간 사람이라면 부채 날개를 펼치기 전 공작새의 행복하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었으리라. 무대 위에 오르기 직전 최종 리허설을 하는 배우처럼, 아름다운 공작새는 제 몸짓으로 곧 펼쳐낼 육체의 찰나적 향연에 한껏 도취되어 있었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는 여배우처럼 공작새는 이리저리 제 모습을 살피고 제 뒤태를 자랑하듯 우쭐대며 이 편의 관람객들을 한번 돌아보기까지 한다.


사람만이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자연은 저만의 도취의 순간을 가지고 있으며, 이 도취는 가장 행복한 자기 시간, ‘한때’에 대한 몰입이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이다. 이 매혹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 도취는 그 자체로 자족적이다. 객관의 시선이 사라진 이 자기 매혹의 시간에서는 마침내 저 자신도 잊는다. 공작새의 부채춤은 어느 순간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배우들처럼 저 자신을 위한 즐거운 연극이다. 이 연극에는 관객도 없이 주인공만이 존재한다.              



한때는 조건 없는 행복의 연극무대     


젊은 시절 알베르 까뮈는 바다가 있는 알제의 작은 마을 티파사에서 다음과 같은 찬란한 청춘의 문장을 남겼다.

   

봄철에 티파사에서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 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태양의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 알베르 까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중에서


“나의 왕국은 송두리째 다 이 세계뿐이다”라고 말한 이 절대적으로 자족적인 청춘이야말로 그의 인생 내내 그에게 몸과 정신에 물기를 가져다준 ‘한때’였다. 그는 티파사의 ‘한때’를 늘 떠올렸다. 이 기억은 늘 항상 생생한 현재로 그의 인생에 계속되었다. 티파사의 ‘한때’는 현재 아닌 현재였으며, 여전히 지나가지 않은 과거이자 행복에 관한 원형적 이미지였다는 점에서 미래였다. 그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태양의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지는 ‘한때’가 있다고.


까뮈는 이 시간에 “구태여 신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딱한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인생에는 형이상학과 논리적 이유·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복한 감정에의 전적인 몰입 순간이 있다. 생활의 필요, 어떤 실용적 계산도 이 순간에는 무용지물이다. 그는 이 ‘한때’를 “정복하기 위해 나의 힘과 모든 능력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그르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그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깨우쳐 가면 되는 것이다”



배우이기도 극작가이기도 했던 까뮈는 인생을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로 여겼다. 그는 배우가 역할을 잘 끝낸 후 느끼는 만족감에 이 ‘한때’를 비유한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성이라고 여겨졌다”. 그에게 행복에 대한 전적인 몰입은 인간됨의 “영광”이 상연되는 연극무대였고, “바로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라는 생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다.


언뜻 면 이는 어떤 허무주의자의 무책임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부조리’의 작가였던 까뮈에게 ‘행복한 한때’에의 몰입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고 유한한 생의 계기였다. 그러므로 매혹과 몰입은 생에 찾아온 삶의 시간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순간의 기쁨을 수용하기 위해 분투하는 생의 성실성을 뜻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들은 어떤 고독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되찾는 고독은 만족감을 동반한다”는 작가의 말을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다.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에 충실한 주체의 시간은 실은 고독한 주체의 시간이다. 그것은 “모든 처세술”을 무시하고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안”은 욕망의 정직성, 행복에의 충동을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제 자신의 중심, 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른다.


반면 ‘가면과 처세술’로 구축된 세계, 그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부르지 않는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행복을 향한 주체의 전적인 몰입이나 욕망을 향한 투쟁은 통제되거나 억압되거나 지연되거나 적당히 타협되어야만 한다. ‘한때’의 시간은 이러한 억압도 지연도 타협도 거부하는 전적인 주체의 시간이다.       



한때는 원형의 시간을 향한 순결한 기도  


폴란드의 작가 쉼보르스카는 ‘한때’를 이렇게 말한다.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치 작았다.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평범했다.

역사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지 못하고

더러운 먼지를 내뿜어 우리를 속였다

우리 앞에는 칠흑처럼 어둡고 머나먼 길과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중에서

    

이 시인에게 “한때”의 찬란함은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무모함에서 나온다. 이 무모함은 까뮈의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처럼 사회의 ‘가면과 처세술’을 사용하지 않는 욕망의 충실성, 행복에의 몰입에 기반해 있다. 이 충실성은 현실원칙에 따른 실용적 고려를 하지 않으므로 ‘한때’의 시간에 속한 이들에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만치 작”고 “간단”하며 “평범”하게 보인다. 오해하지 말자. 이 간단함과 평범함은 상투적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직한 욕망은 진정한 “웃음”을 동반하며, 그 기준은 핵심을 관통하므로 ‘기도문의 진실’처럼 간명하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의 최종윤리처럼 ‘한때’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는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따라가라’.

  

모든 인간의 ‘한때’가 순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각자의 ‘한때’를 떠올릴 때 갖는 그 설렘은 우리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느낌 때문이지만, 여기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설렘이 행복을 향해 우리가 세상에 대항해 발휘했던 모종의 비타협성, 어떤 욕망의 정직성과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한때’를 떠올리며 나의 무의식은 일순간 “더러운 먼지”로 뒤덮인 ‘지금 여기’의 나를 발견하며 화들짝 놀란다. 우리들이 저마다 자기의 ‘한때’를 떠올릴 때 설레는 까닭은, 자기가 ‘한때’ 지녔던 아이처럼 천진한 영혼의 시간이 떠올라서는 아닌가.


지금은 잃어버린, 또는 망각해버  '한때'라는 이 설렘의 원형적 순간은 간혹 역사의 문틈으로 찾아들어오는 메시아의 한 줄기 빛처럼 경건할 때가 있다.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는 행복을 바라는 나,  결국은 나와 네가 모여 이룬 공동의 역사적 지평 위에 도래하길 바라는 억압 없는 삶을 향한 순결한 제문이므로.


‘지금 여기’에서 ‘역사의 실패’는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쓴 빵 조각만 남”겼지만, “한때”의 무모함과 행복을 향한 열정을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더 이상 ‘죄악’으로 오염시키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의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기억’을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는(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행복의 약속을 도래케 하려는 자들의 윤리라고 부르자.  


     



          


* cover image by Norman Rockwell

** 「라일락 속의 연인들」, 마르크 샤갈

*** 깃발을 든 대학생, 68혁명 당시 파리

*** 알베르 까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번역 김화영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번역 최성은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의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실험적 융합대안대학을 설계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고전 과목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연구디자인센터(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연구기관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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