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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Jun 08. 2018

유령이 되돌아오는 시간

The Time is out of joint

공동체의 빚     


햄릿...... 맹세해.

유령 (땅 밑에서) 맹세하라.

〔그들이 맹세한다〕

햄릿 쉬어라 쉬어, 불안한 혼령 아! 그럼,

내 모든 사랑으로 자네들에게 날 맡기네.

그리고 햄릿처럼 가난한 사람이

사랑과 우정을 표할 길은, 신이 원하면,

부족하지 않을 걸세. 같이 들어가지,

또한 항상 손가락을 입술에, 부탁이야.

뒤틀린 세월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아, 저주스러운 낭패로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아니, 자, 우리 같이 가세. 모두 퇴장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유령’에 관한 드라마다. 유령은 드라마의 처음부터 무대에 나타나 수시로 출몰한다. '되돌아오는 것(revenant)', 이것을 프랑스어로 '유령'이라고 부른다.



이 드라마에서 유령을 보는 이는 왕자 햄릿 한 명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목격한다는 사실은 '공동 존재'로서 유령의 정체성을 암시한다. 이 정체성은 유령이 여러 사람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은 아닌가. 즉 유령의 출현은 ‘공동체’에 대한 호소가 아닌가. 그러나 유령이 여러 사람에게 목격되었다고 해도 유령의 말을 모두 알아듣지는 못한다. 누구나 유령과 마주할 수는 있으나, 아무나 유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유령의 소리가 그들에게 안 들려서인가. 유령의 호소에 혹시 공동체가 사이클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유령과 공동체 간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불통은 유령에 대해 공동체가 진 '빚'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국의 귀신(鬼神)을 보자. 귀신도 되돌아온다. 귀신은 그래서 ‘귀신(歸神)’이다. 저 세계로 완전히 가지 못해서 되돌아오는 것으로서의 귀신은 어떤 억울함과 관련이 있다. 이 세계가 좋아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눈을 못 감는다. 적지 않은 경우 이 억울함은 귀신이 살아생전에 존재했던 공동체의 억압과 관련이 있다.  


한국 귀신들의 대부분이 '여자'인 것을 생각해 보자. 왜 여자인가. 여자들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공동체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따르고, 가문을 위해 희생하면서 공동체의 기율에 복무했으나, 공동체는 그들에 감사하지 않는다. 전통사회의 귀신만 그러한가. 지금도 괴담이 번성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여자고등학교’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나. 아이, 여자, 학생이 우리 사회 공동체의 억압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이 되돌아오는 시간이 밤인 것은 밤이 ‘무서운 시간’이라서가 아니다. 밤은 낮의 기율-그것은 산 자들의 기율을 뜻하는데- 즉, 공동체의 기율이 잠들어 기율이 약화되고, 그 ‘쌩얼’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이 가세


다시 햄릿 이야기로 돌아오자.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유령의 출현은 공동체가 오염된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유령의 말을 알아듣는 유일한 자는 왕자 햄릿이다. 유령의 말을 알아듣는 그를 산 자들의 공동체는 그가 유령에 '신들려'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유령의 말을 알아듣는 햄릿은 유령의 호소에 공감하며, 유령의 억울함에 격노하며, 결국 유령의 '영혼에 들려(신들려)' 유령과 ‘맹세’로 자신의 운명을 연결시킨다.  햄릿은 유령과 ‘함께’ 맹세를 공유한다. 햄릿-유령은 이 드라마에서 ‘함께 존재’다.


이 맹세는 주체의 시간을 공동체의 절대적 타자인 유령의 억울한 시간과 연결시키며, 이 주체--타자의 맹세는 주체의 책임을 미래로 내던지면서 책임질 수 없는 미래의 시간까지 책임지겠다는 비극적 결단을 포함한다. 그들은 맹세를 통해  “우리”가 되고, 행동의 동지가 된다.(“우리 같이 가세”). ‘땅 밑’은 유령의 근거지였지만, 맹세를 공유하는 햄릿에게는 ‘땅 밑’이 이제 자기 근거가 된다. 유령과 ‘함께 존재’를 맹세한 햄릿의 시간은 땅 위에 있지 않다. 그는 땅 위에 살면서도 땅 밑의 시간에 속하는 자다. 그는 산 자들의 시간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시간을 (대신) 산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유명한 햄릿의 질문은 이런 점에서 ‘죽느냐 사느냐’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육신의 근거를 산 자들의 세계인 이승에 두면서도, 영혼의 근거를 죽은 자의 세계인 저승에 둘 수밖에 없는 햄릿의 분열증적 질문이다.


이 분열증적 질문은 결국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revenant)’으로서 유령의 분열증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되돌아와야만 하는 유령.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문제는 되돌아와야만 하는 ‘당위’와 연결된다. ‘존재’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왜 되돌아오는가.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기 The time is out of joint’ 때문이다.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을 바로 잡는 것, 어긋남을 정상으로 복귀시키는 것, 시간을 본래 궤도로 귀환시키는 것, 드라마는 이를 “햄릿은 그걸 바로 잡으려고 내가 태어났다”라고 표현한다. '함께-존재'로서 햄릿-유령에게 ‘시간의 정상 복귀’는 소명으로서의 윤리다.


햄릿은 이 소명을 “사랑과 우정”의 윤리, “신이 원”하는 바라고 말한다. 신이 원하는 사랑과 우정의 윤리, 신적인 시간의 복귀 또는 정상으로 전환되는 시간이란, 곧 메시아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령에 의해 암시되고, 유령에 신들린 자의 목소리로 발설되기에 산 자들의 현실에서 이해될 수도 수락될 수 없는 시간이다.    


        

사물(thing)의 윤리


철학자 데리다(『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따르면, 이 유령은 뼈와 살이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사물 thing’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존재하지만 지각되지 않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그것을 그저 ‘어떤 것~thing’ ‘사물 thing’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 유령은 사람들에게 줄곧 ‘~것/사물(thing)’로 불린다.(미셀러스: 어, 그것이 오늘 밤에도 다시 나타났어. 바나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그러나 지각되지 않는 ‘이 사물(this thing)’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The time is out of joint).


햄릿은 시간의 어긋남을 바로잡도록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산 자들의 세계시간을 ‘시간의 올바름(être-droit)’과 명료하게 대립시킨다. 그는 어긋난 시대가 섭리에 따라 '올바르게' '법(droit)'을 따라갈 수 있게 바로 잡는 자의 역할을 하게 된 자기 운명 탄식한다. 이 탄식은 ‘시간의 올바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서 사물-유령의 저주이며, 지하의 억울한 존재와 함께 하려는 “사랑과 우정”의 맹세이기도 하다.  




이 사랑과 우정의 맹세는 그리스 고전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나는 산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많다”라고 했던 수수께끼 맹세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자가 되돌아오는 시간’이란 육체는 사라졌으나 온전히 죽을 수 없는 존재의 시간이며, 산 사람들의 시간의 정당성을 되묻는 물음표의 시간이다. 이 물음표는 현재 세계시간에 육체의 몸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존재들의 시간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즉 앞으로 태어날 자들의 시간을 포함한다. 그것은 회복되어야 할 시간과 도래해야 할 당위로서의 미래 시간까지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시간이다. 그러므로 유령의 시간은 부정의한 공동체의 함몰된 구멍에 홀연히 나타난 ‘보편적’ 시간이다.



되돌아오는 시간으로서 유령의 시간은 망령처럼 현재에 틈입하여 ‘시간의 올바름’으로의 회복을 호소하면서, 현재 시간 너머를 환기하고, 현재 시간을 초과한다. 안티고네 역시 햄릿과 거의 유사한 맥락에서 이 ‘죽은 자들의 시간’을 왕의 법에 대비되는 ‘신의 법’이 지배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햄릿이 이 유령적 시간의 윤리를 ‘사랑과 우정’의 윤리로 요약했다면, 안티고네는 “우리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라고 말한다. 문학의 시간은 늘 이 죽은 자들의 시간, 유령의 시간에 ‘함께-존재’가 되어 “우리 같이 가세”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유령을 보는 햄릿 왕자. Henry Fuseili(1796)

교실 풍경. 영화 <여고괴담1>(1998) 스틸 컷.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데리다. 진태원 번역.

오빠의 시체를 찾아간 안티고네. Lytas nikiforos(1865)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의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실험적 사회디자인대학을 설계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고전 과목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연구기관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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