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지인의 얼굴
‘우리’는 시간을 공유했을까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다. 가까운 이의 예상치 못한 부고(訃告)를 전해 듣는 순간만큼이나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때가 있을까. '나'는 무슨 근거로 그동안 ‘그’를 ‘우리’라고 생각했을까. 그와 내가 공동의 존재 영역에 있다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은 생의 시간이 각자의 몫일뿐이라는 완강한 사실을 엄중하게 환기한다. 스스로 선택한, 어쩌면 강요당한 것일지도 모르는 죽음이 그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주는 참혹성은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다른 것이 아니다. 공유했던 시간이 있었다고 믿었지만, 삶의 시간은 제 각각 다른 시계침을 작동시키고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교집합일 수는 있지만 동치일 수는 없다. 우주적 시간에서 그와 나는 아주 부분적으로 교차했을 뿐이다.
설령 떠나간 그가 식구였다고 하자. 우리 몸에 혈연적 유사성, DNA의 상동성이 깃들었다고 한들 삶의 개별성은 각자의 몫으로 주어지고 생산된다. 시간을 만드는 것은 체험이지 피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 공동공간, 유사 공동세계에 거주하는 식구는 상대적으로 이 체험의 상호성을 타인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쉽게 더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를 ‘나’의 연장선이라고. 피의 동질성은 공간의 공동 거주, 그리하여 시간을, 체험을 전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의 시간이 곧 나의 시간이다. 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그는 곧 나다!
존재의 시간은 개별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는 죽음을 전해 듣는다. 단순한 부고가 아니라 ‘스스로 끊은 목숨’이란 얘기를 전해 듣는다. 이러한 종류의 부고가 주는 충격은 몇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일반적 시간관을 해체한다.
우선 드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생의 시간에 대해 갖는 ‘인생’이라는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개념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평균 수명'에 대한 산술적이고 기계적인 적용을 통해 우리는 개별적 인간 존재의 생의 시간을 무차별적인 것으로, 부지불식 간 ‘양(量)’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인생'은 '평균치'로 예비 되어 있거나 보존되어 있지 않다. 나의 생의 시간이 타인의 시간과 비슷한 평균치로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폭력적 부고가 주는 가장 큰 충격은 그와 내가 ‘나눈 시간’이라는 생각이 근거 없다는 걸 확인하는 데에서 온다. 그것은 어떤 동질성, 그와 내가 나누었다고 생각했던 체험들이 나의 상당한 오해였음을 확인시킨다. 나의 시간과 그의 시간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시간의 분리는 ‘주체성’ 또는 ‘주관’이라는 이름의 ‘나’가 오해하고 있는 ‘타자’에 뒤늦게 눈뜨게 한다. 그는 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있었으며, 그는 나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생각과 고민과 절망에 대해 타인이었으며, 그의 가장 절박한 시간에 그의 ‘곁에’ 있지 못했던(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던 것일까.
영정의 얼굴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느닷없는 부고 소식을 듣고 황망한 정신으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막상 장례식장에 와서는 머뭇대며 그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이때 나는 사실 확인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고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초조감 속에 주춤댄다. 하지만 상황을 마냥 지연시킬 수는 없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간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라고 여겼던 ‘그’의 사진을 영정으로 마주한다. 사진 속에 얼굴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웃고 있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 나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대면하는 이 순간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시간 지평으로 시간이 분할되는 순간이다.
사진 속의 얼굴은 생전의 얼굴이다. 나는 그의 생전의 얼굴을 영정으로 마주한다. 영정의 얼굴은 문제적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얼굴은 산 자의 얼굴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그들’의 죽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현재 이 세계시간의 표면이자 공동공간의 표정이다. 장례식장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경험이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다른 시간, 다른 차원과의 조우를 방금까지 살아있던 타인의 생생한 얼굴을 통해 마주한다는 사실에도 있다. 산 자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한 표면이었던 생생한 얼굴은 국화꽃과 향로의 작은 불씨가 만드는 가느다란 연기에 휩싸여 제대 한가운데 무심히 놓여 있다. 사진 속 얼굴은 나를 마주하고 있지만 그 얼굴은 이제 다른 시간으로 물러나 있는 얼굴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의 얼굴을 갑작스럽고 폭력적으로 현재 시간에서 과거의 벽장으로 밀어 넣는다. 그것은 2차원과 3차원의 조우처럼 어그러져 있다. 얼굴을 서로 맞대고 있다는 뜻의 ‘대면(對面)’은 말이실체에 가 닿지 못하는 물리적 어긋남에 직면한다. 대면은 일종에 어떤 허깨비와의 조우 비슷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대면을 전적으로 허깨비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영정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존재의 표면이다. 영정과의 대면은 저 시간으로 물러났으나 아직 여기 시간에 흔적을 지우지 못한 그림자와의 물리적 조우다. 그의 얼굴은 현재에서 막 과거가 되었지만, 이 과거는 현재에 깊은 시간의 웅덩이를 만든다. 웅덩이는 ‘우리’라는 공동시간을 깊이 함몰시킨다.
영정을 마주한 순간 우리들은 갑자기 교란된 시간의 웅덩이에 빠져 당황스럽고 고통스럽다. 매끄럽고 연속적이던 이승의 지표면에 다른 차원으로 깊이 무언가가 패였기 때문이다. 영정의 얼굴은 그 웅덩이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이해할 수 없어 극도로 당황스러워 하는 이 세상 공동시간 속 산 존재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영정의 얼굴은 우리를 마주하고 있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두 시간의 어긋남을 표면화 한다.
스스로 다른 세상을 선택한 지인의 영정은 이 어긋남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괴상하고 폭력적인 시간의 절단면이다. ‘우리’였던 줄 알았던 그는 이 선택을 통해 자신이 공동공간 속에서 실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던 타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천명한다. 공동공간, 공동시간, 공동이상이라는 관념은 구겨진다. 망각되기는 하지만 메울 수는 없는 깊고 검은 구멍을 날카롭게 드러낸 채. 이러한 종류의 얼굴에서 진정한 비극성은 이승과 저승의 시간 지평 사이에 놓여 있지 않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이 얼굴이 ‘우리’라는 이름의 안이한 공동공간, 공동시간에서 이미 철저히 ‘타자의 시간’에 결박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이 뒤늦게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는 없다. 온통 타인들뿐이다.
부조리한 죽음은 부조리한 타자가 갑작스럽고 사납게 드러나는 시간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미래지음행성)'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 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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