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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Sep 15. 2018

9월

이행기(移行期)에 관하여

도시의 9월 초는 언뜻 보면 8월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한낮의 햇볕은 쨍쨍하고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짧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들, 반바지를 입은 아가씨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쨍쨍한 햇볕은 한여름의 그것과 달리 따갑게 살갗에 닿는다. 한여름과 달리 맨살이 햇볕에 노출되어도 몸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으며 심한 갈증이 생기지도 않는다. 땀 흘리게 하기보다는 땀을 말리는 햇볕이 9월 햇볕이다.

 

달력이 8월에서 9월로 넘어갔다고 해도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가로수로 서 있는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인도를 덮는 것도 아니고, 산천이 단풍으로 붉게 물드는 것을 바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살갗에 닿는 햇볕의 따가운 감촉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깨운다. 반팔을 입고 반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한 계절, 한때의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걸 안다. 거스를 수 없는 엔트로피의 흐름을 느낀다. 고개를 들어보라. 하늘은 한껏 높아지고, 하늘색은 좀 더 에머럴드빛에 가까워지지 않았는가. 밤이 오면 바람은 듀얼 시즌을 선사한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며 몸 바깥에서 겉돌던 여름 공기는, 이제 몸 내부로 바로 스며들어 온다. 달라진 공기를 느끼는 것은 피부가 아니라 몸의 장기들이다. 감각의 각성은 표면이 아니라 몸 내부로 스며들어온 다른 시간의 공기 같은 것에서 이루어진다.



사물들에는 이행의 시기가 있다. 이행기의 상당 기간 세계의 표면은 바뀌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과거는 지속되는 듯이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민감한 더듬이를 가진 소수를 제외한다면, 그 시간 내부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간이 이행기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이행기는 9월의 초입과 같아서 다음 계절의 기미들을 잔뜩 담고 있다. 변화에 대한 지각은 의식된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감각으로 스민다.  변화는 기미들이 축적되는 완만한 그래프가 아니라, 이전과 이후를 비가역적으로 나누는 불연속 단층면이다. 하지만 변화가 표면화될 때까지 변화는 의식되지도 도드라지게 눈에 띄지도 않 는다.               


여름철에 우리는 모두가 싸우는 짐승들이었다

태양과 싸우고 바람과 싸우고 스스로와 싸우고

이웃들과 싸우는 성난 짐승들이었다     

사람들뿐만 그런 게 아니라

풀이나 나무나 새들이나 곤충도 하늘이나 산맥이나 강물까지도

서로 으르렁거렸고 다투며 불화를 일삼았다     

이제금 하늘은 개이고 맑고 높은 바람은 시원하여 9월

9월은 자성의 계절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은 몸을 돌려 제 발자국을 돌아다본다

9월은 치유의 계절

제가끔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다     

할 수만 있다면 부드러운 영혼의 혓바닥을 내밀어 스스로의

쓰린 상처를 핥아줄 일이다

상처받은 서로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아줄 일이다     

- 「9월의 시」 부분, 나태주


지난 여름 ‘나’는, ‘우리’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우리는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은 ‘단독자’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이 단도직입적 질문은 내가, 우리가, 나-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질문은 표면의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내 타자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 물을 수도 있겠다. 나는 너에게, 우리는 우리 주변에, 나는 내 안의 다른 '나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폭염 속 한여름, 우리는 이 질문을 잊는다. 우리 자신이 노여운 싸움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사나운 풍경의 일부로, ‘성난 짐승들’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인간의 말’ ‘사람의 얼굴’은 망각되어 었다.   9월의 햇볕은 따갑지만, 망각하고 있는 이 질문을 나에게,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여름철”에 우리는 “태양과 싸우고 바람과 싸우고 스스로와 싸우고/이웃들과 싸우는 성난 짐승들”이 아니었는가. “서로 으르렁거렸고 다투며 불화를 일삼”지 않았는가. 어느새 한껏 높아진 하늘과 몸 깊숙이 스며들어오는 바람이, 한 여름 내 성난 얼굴을 들여다보라고 밀한다. “몸을 돌려 제 발자국을 돌아다”보라고 촉구한다.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이 자신이 타고난 생명의 원리에 의지해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살고 있는지 묻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상처”와 “상처받은 서로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아”주라고 다독인다.

내가 나의 타자에 대해, 우리가 우리의 타자와 맺는 그 관계 방식이, 곧 나와 우리 정체성이다. 목숨 가진 것들을 죽음의 논리로 만날 때, 죽은 것은 타자뿐만 아니라 나-우리 자신이다. 생명의 원리로 타자와 만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존재는 그 자체가 관계의 원리이므로.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성난 짐승"이라는 죽은 존재에서 "부드러운 영혼"을 지닌 생명체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물음 자체가 이행의 시작이다. 어떤 적대성, 어떤 이해관계에 의해 내가 만든 타자, 우리가 만든 타자에 노여운 마음을 누그러뜨릴 때 "부드러운 영혼"으로의 존재 이행은 시작된다. 한 시인은 이 계절에 피는 꽃에 비유하며, 이런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마음을, “누구도 핍박해 본 적이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김사인, 「코스모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호주머니에는 내 것도 네 것도 없다.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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