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그 시간 어디에 무엇으로 있는가
책을 쓸모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책, 알고 있던 사실의 부정확함을 교정해 주는 책, 알고 있던 지식을 다시 한 번 정리해 주는 책. 세 가지 종류의 책은 조금씩 다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책을 고정된 사실들의 묶음으로서 지식패키지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이해 지반 위에 있다. 이런 이해 지반에서는 책은 명사형 물건처럼 보인다. 물건으로서의 책은 이미 완료된 사물이며, 독자는 그 사물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 여기에서 책은 글자들이 인쇄된 사각형의 종이묶음으로서, 서점이나 책상 위에 놓여 특정 공간을 점유한 물건 형식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내가 들고 다닐 수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이때 책은 내 손에 있으며, 그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사실들의 목록이며, 내 현실의 삶에 유익한 무언가를 주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책은 ‘좋은 물건’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전래의 교훈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이에는 책이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 현실적 유용성에 관한 확고부동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삶을 ‘쓸모’를 고려하여 구축된 유기적 의미 연관 체계로 규정했다. 책도 그런 점에서 보면 현실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도구다.
그런데 책은 정말 도구인가. 아마 책도 분명히 어떤 종류의 쓸모를 지니고 있을 테니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책의 ‘쓸모’가 문제가 된다. 책의 쓸모가 정말 쓸모일까, 라고 묻는다면 과연 우리는 이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여기 책상이 있고, 그 위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당연히 우리는 하나의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책을 완결된 지식의 종이묶음, 하나의 소유물, 물질성을 소비하는 물건이라고 본다면 이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책이 다른 도구들처럼 어떤 규정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성을 가지고 출현한 사물이며, 그 책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필요에 따라 책이라는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것일까.
‘소비’라는 말을 먼저 생각해 보자. 소비한다는 말은 우선 물건이 내 현실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필요가 내 의지에 의해 조정될 수 있고 제어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아가 '만족스러운 소비'가 가능하려면 물건은 그것이 지닌 가능성이 소비자에 의해 남김없이 탕진되어야 한다. 음식을 튀기는 기름을 예로 들어보자. 기름은 맛있는 음식을 튀기기 위해 달궈지고 끓고 결국에는 음식 안으로 스며들어 간다. 기름은 음식을 위해, 또는 음식을 만들려고 하는 내 의지와 필요에 따라 탕진된다. 탕진된 기름에서 더 이상 쓸모는 남지 않는다. 잉여가 남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소비자의 필요로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무엇이 모두 흡수되었다는 뜻이다.
책이라는 물건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연 쓸모 있게 소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잉여 없는 책의 쓸모 탕진. 책을 읽은 결과가 내가 처음 독서 행위에 기대했던 최초 목적에 부합하는 경험을 당신은 몇 번이나 해 보았는가. 오히려 만족스러운 독서 행위란 당신의 기대를 배반하는 어떤 새로운 영감과 당혹스러움, 예상치 못한 발견적 시선으로의 인도가 아닌가. 책이 놓여 있는 ‘거기’가 어디인가 하는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되는 지점도 이즈음이다. 독자가 의도했던 쓸모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벗어나서, 오히려 기대를 배반하는 곳으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의 기이한 힘. 여기에서 우리는 책상 위에 놓인 책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물리적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성 남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 앞에 있던 제자 안성자유가 물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도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질 수 있고, 마음도 죽은 재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앉아 계신 분은 이전에 이 책상에 앉아 계시던 그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참 잘 보았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 그런데 네가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너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들어보았겠지만,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설령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가 물었다. “감히 물어도 되겠습니까?” 자기가 대답했다. “땅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지. 너도 그 윙윙하는 소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산의 숲이 심하게 움직이면, 큰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깊은 웅덩이처럼, 더러는 좁은 웅덩이처럼 제 각기 생긴 대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데서 나오는 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앞에서 가볍게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우우 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장자(莊子)』 중에서
책상 ‘위'에’ 놓인 『장자(莊子)』 책을 집어 드는 독서의 시간을 생각해보자. 이런 시간에 책이 놓인 진정한 공간은 어디인가. 이런 문장들을 독자가 접하는 순간 책은 독자가 그때까지 살고 있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낸다. 독서의 시간은 독자의 현실을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절단한다. 이 시간에 독자는 책을 선택했지만, 책이 그들을 끌고 들어가는 '세계'를 선택할 수는 없다. 선택당하는 것은 책의 문장과 마주한 독자 자신이다. 독자는 책의 세계에 붙들린다. 독자는 즉시 책이 펼쳐낸 세계 안에 붙잡혀 그곳의 시간을 살게 된다. 그 세계를 어디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독자가 지금까지 살던 ‘현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있다. 책이 끌고 들어간 그 세계는 독자가 살던 현실과는 ‘다른 곳’이다.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을 이용하여 말한다면, 독서의 시간은 내가 그동안 구축해왔던 ‘쓸모’의 연관체계로 이루어진 삶의 범주 너머에 있는 어떤 곳이다. 내가 지녀온 유용성의 관념은 이 시간에는 무용지물이다. 장자가 들려주는 아름드리나무의 구멍들, 제 각각의 웅덩이에서 들리는 저 갖가지 온갖 우주의 소리들은 쓸모도 쓸모없음도 아닌 세계, 그러니까 '쓸모'라는 관념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그저 어떤 존재가 드러나는 세계다. 여기는 도구의 세계가 아니다. 유용성의 기준 너머에 그저 '존재'하므로 이 세계는 소모되거나 소비될 수 없다. 탕진도 불가능하다. 독자는 이 존재의 세계를 ‘물건’으로 다룰 수도 없고 제멋대로 판단하거나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할 수도 없다. 책의 세계에서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립적인(neutal)' 시간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중립적 시간이야말로 책과 만나는 진정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 시간에 책이 내 손아귀에 있는 물건이 아니며 도구적 유용성을 지닌 소모품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가 책을 읽으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주의 바람을 마주하여 그 소리를 온전히 듣는 일뿐이다. 책을 읽는 시간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일은 책에 대해 내 주체성이 포기되는 바로 이 순간의 경험이다. 책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타자의 세계에 끌려들어가는 수동적 시간을 선사한다. 책에 의하여 주체가 무화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독서의 시간에 '주체가 무화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함의를 지니는가.
이 장면에서 자기가 말하고 있는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평소에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없지 않았던 소리’다. ‘없지 않음’은 ‘없음’과 ‘있음’의 경계에 존재한다. ‘없음’도 아니지만 온전한 ‘있음’도 아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평소에는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만 들리고,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왜 그 소리만 귀에 ‘나타나는가’. 우리가 사는 현실이 도구 연관, 즉 실용성에 지향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부는 퉁소 소리”는 그 현실 유용성에 접합된 소리이다. 거기에서 ‘의미’는 ‘쓸모’의 관점으로 나타나고 가치서열이 매겨진다. 긍정과 부정, 미추의 개념이 여기서 발생한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없지 않았으나, 쓸모의 도구연관에 속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고, 들리지 않는 세계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세계다. 어쩌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들리지 않음으로써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세계, 그들이 모르는 세계로 남을지도 모른다. 독서의 시간은 있음과 없음 '사이'의 세계, 있음의 잠재성을 현재화한다. 진정한 독서의 시간은 긍정과 부정, 미추 판단 이전의 중성적 사물들과 독자-나를 마주 세운다. 이 특이한 시간 체험은 그래서 낯설다. 그리고 이 시간체험은 이중의 의미에서 주체성을 무화시킨다.
그러므로 독서의 시간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어떻게 이 중립적 경험 지대로 우리가 진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장자가 자기의 입으로 말하는 이 장면을 나는 독서 체험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는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독서 전략은 “땅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듣기 위해 자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나는 나를 잃어버”리는(吾喪我) 일이다. 책을 집어든 자의 주관성, 즉 완강한 자아를 누그러뜨리고 책 속의 사물들, 책 속의 인간들, 책 속의 갖가지 타자들에 나를 개방해야 한다. 타자의 소리는 내 완강한 주관성, 자기 확신을 누그러뜨려야 들린다. 다른 시간으로 진입하는 데 가장 큰 장벽은 내 주관성이다.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독서 시간은 지식의 습득을 통해 ‘나’를 단단하게 쌓는 시간이 아니다. ‘나’를 이완시키고 나라는 장벽을 헐어버림으로써, 나 아닌 세계가 내 의지와 내 필요나 이해관계, 내 판단과 무관하게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나의 유한성을 각성하면서 나를 해체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서 ‘나’는 현실의 공동공간을 살고 있는 수많은 ‘나’의 유사버젼인 ‘너’도 아닌' 중성적인/중립적인' ‘그것’이 된다.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사람도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 다른 시간을 사는 지칭할 수 없는 비인칭적 존재로서 무엇이 된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우월성도 없이, 그렇다고 열등한 존재로의 추락도 아닌 방식으로 존재 중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시간 체험은 나를 둘러싼 현실, 내가 인식하는 그 현실을 구축하는 ‘쓸모’의 연관 체계가 세계의 전부도 아니며, 세계의 진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한다. 없지는 않았으나 나타나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나타나지 않은 세계가 훨씬 더 넓고 크다는 사실을 고지한다. 진정한 독서의 시간은 ‘나’라는 경계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가치 체계를 판단중지시키는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장자에서는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땅' 또는 '어디에도 없는 땅'(無何有之鄕)이라고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땅은 이상향도 아니며, 이상향이 아닌 세계도 아닌, '그저 있는' 세계일 뿐이다.
모리스 블랑쇼가 문학에 대해 했던 얘기를 독서 체험에 적용해 보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책을 읽는 시간은 몽상도, 진실의 묘사도, 건설도, 구원을 꿈꾸는 시간도 아니다. 책은 '대안적으로'(alternative)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책의 세계는 여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저 존재할 뿐인 어떤 세계를 드러낼 뿐이다. 그런 방식으로 책은 희망을 원한다. 책의 희망은 희망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를 어떠한 절망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책은 우리가 알고 있고 생활하는 현실이 존재의 유일한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책은 지금 독자의 현실에서 판단되고 추측되고 계획할 수 있는 유용성의 관점을 넘어선 어떤 곳을 지시하므로, 책의 희망은 우리가 바로 지금 이 현실에서 알아볼 수 있는 가나안쪽을 향해 있지도 않다. 그 방향은 광야다. 사막이다. 실용성을 지시하지 않는 세계라는 점에서, 그곳은 거주의 조건이 상실된 곳이며, 누구의 이해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의미와 가치의 유배지일 수도 있다. 책을 읽는 시간은 그렇게, 희망 없는 시간에 희망을 거는 기이한 시간 체험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ㆍ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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