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은 누구인가
빨갛고 하얀 나라
각박한 세태가 되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연말 이 시기의 시간성을 거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각적으로 일깨우는 것은 크리스마스캐롤이다. 최초에는 교회의 종교음악으로 시작되었을 이 음악은 이제는 종교적 색채와 무관한 세계인의 시즌송이 되었다. 신부가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을 하는 풍경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스님이 크리스마스캐롤을 사람들과 따라부르는 모습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캐롤은 최고의 겨울노래다. 연인들의 러브송이고,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합창곡이자, 핫한 팝스타와 걸그룹들이 매년 시즌마다 달리 편곡하여 발표하는 팝 레퍼토리다. 크리스마스캐롤은 같은 멜로디와 가사에 대해 가장 많은 변주가 이루어져 온 노래이며, 전세계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 번쯤은 다시부르기를 시도하는 노래다.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다원적인 세계에서 거의 모든 지구인이 한 종류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듣는 시간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크리스마스캐롤을 듣는 시간은 대개 내 의지로 오기보다는 바깥에서 온다. 내가 직접 캐롤을 틀기도 하지만, 이 시즌에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캐롤은 대체로 우리를 가볍게 흥분시키며 이유 없이 들뜨게 한다. 음악 속에 들어가는 종소리 같은 기본 악기 편성만으로도 우리에게 천진한 아이의 시간, 행복한 기억, 사랑의 약속을 환기하며, 화해와 용서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 음악은 색색구슬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 산타할아버지를 태우고서 루돌프사슴코가 끄는 눈썰매, 빨간 양말 속에 감춰진 선물, 북쪽의 눈나라, 성당의 종소리를 불러들인다. 캐롤의 색은 빨간색과 하얀색 같다. . 분명한 것은, 캐롤을 듣는 순간 서로 다른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기분에 휩싸이면서 삭막한 지금 여기와는 다른 곳으로 '함께' 이동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캐롤은 너와 나를 부지불식간 '우리'로 묶어 지금과는 다른 ‘공동의 나라’로 데려간다.
캐롤은 구원에 관한 노래
물론 크리스마스캐롤에 모든 이들이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찰스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캐롤」에서 주인공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캐롤에 냉담하다. 아이들이 부르고 다니는 캐롤은 그에게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린다. 캐롤은 현실원칙만으로 작동하는 스크루지라는 캐릭터에게 다른 차원의 기억과 아름다운 가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에게 세상의 존재는 오직 교환가치, 즉 화폐적 척도로만 평가된다. ‘구두쇠’로 표현된 이 인색한 인간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물질적 번영이 배태한 한 인간 전형이다. 하지만 디킨즈가 자신의 소설에서 도덕적인 시선으로 풍자하고 있는 이 인물은, 실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자기 성공만 살피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죄 없는 인간’이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당시 승승장구한 부르주아계층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으나, 작가의 도덕적 시선을 제거한다면 스크루지는 예외적 인물이 아니다. 물질적 성공만이 유일한 가치인 듯이 여겨지는 오늘날 사회에서 보자면, 타인에게 냉소적이고 현실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해 사는 그는 우리 시대 평범한 개인이다. 다만 그는 재화의 축적에 성공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다. 스크루지가 특별한 캐릭터가 아니라 시대의 전형적 존재 유형이 되어 있는 오늘날, 크리스마스캐롤은 그 음악을 듣는 우리를 지금 여기와는 다른 시간,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가. 김애란의 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 의 클라이맥스는 크리스마스캐롤이 울려 퍼지는 성탄전야의 에피소드와 관련이 있다. 대학가 주변 원룸에서 자취하는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자취생인 ‘나’는 이 시즌의 캐롤을 한 편의점에서 듣는다. 흥미로운 것은 크리스마스캐롤이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는 편의점 입구에 대한 묘사다.
큐마트의 특징은 우선 센서식 자동문에 있다. 큐마트의 자동문은 코가 예민한 짐승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기웃거리는 손님이 있으면 컹, 하고 짖듯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자동문은 항상 구원처럼 열렸다.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창비, 2005)
눈에 띄는 것은 저 자동문이다. 작가는 ‘예민한 센서식 자동문’을 이 시대에 열리는 ‘구원’의 현실적 의미로 관찰한다. 오늘날 가장 달콤하며 유혹적인 크리스마스캐롤은 상점, 특히 백화점 같은 곳에서 울려 퍼지며, 이 사회에서 인간의 구원은 ‘화폐-상품’의 교환·획득에서 발생되는 물리적 메커니즘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구원’은 화폐적 현실에 좌우된다. 화폐적 현실이 심리적이고 상상적인 차원까지 지배한다. 한국에서 교회의 대형화ㆍ기업화ㆍ상점화는 구원의 세속화가 마치 포르노그라피처럼 외설화되기까지 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이 묻는 것은 크리스마스캐롤이 본래 담지하고 있는 구원의 참된 의미다. 이 소설은 지극히 고전적인 주제를 고전적인 형식으로 질문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캐롤을 듣는 순간 환기되는 저 설레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인도하는 다른 시간, 공동의 나라는 이제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팝송이 되었다 하더라도, 캐롤은 단순한 시즌송이 아니다. 캐롤은 ‘메시아’라고 불린 특별한 존재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다. 죽음으로부터의 재생, 죄의 대속, 구원을 위한 희생제의적 노래다. 신앙으로서 기독교를 지지하지 않는다 해도, 한 특별한 정신의 탄생과 투쟁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 드라마는 대단히 드라마틱하며 감동적이다. 설령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이 특별한 정신의 담지자가 행한 잘 알려진 생의 드라마는, 존재의 구원과 관련하여 현실원칙의 노예로 사는 우리들의 생각이 도달하지 못하는 먼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크리스마스캐롤을 들을 때 우리가 음악을 통해 이끌리는 다른 기분도 결국은 그 '먼 곳'을 향해 나 있을 것이다.
메시아는 ‘이웃’이다
캐롤은 메시아에 관한 노래이다. 구세주, 메시아(masiah)란 누구인가.(‘그리스도Christos’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성경에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게 되었는데, 랍비와 레위 사람은 그 옆을 그냥 지나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교회에 가는 중이었다. 랍비나 레위 사람은 유대공동체에서 종교적·법률적 권위를 대표하는 지배계층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준 것은 그 공동체 내에 속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유대공동체에서 그는 법률적·사회적·문화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이방인’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예수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 사람을 ‘이웃’이라고 불렀다.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은 친구가 아니다. 이웃은 친구나 동지나 동료처럼 공통의 인연이나 공통 관심사나 공통의 이해관계로 엮여 있지 않다. 이웃은 핏줄로도, 학연으로도, 역사로도 이어져 있지 않다. 이웃은 가족도, 가문도, 동문도, 나라도, 민족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가까이 있던' 사람이다. 그를 규정하는 것은 별다른 필연성 없이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뿐이다. 사마리아인 역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 곳을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웃'이 되는가. 예수는 그 곁을 지나가던 다른 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만을 '이웃'이라고 지칭한다. 그가 물리적 우연성을 자기 존재 의지를 통해 주체화, 즉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지만, 자기 존재 변환을 위한 충실성을 발휘함으로써 '관계'가 발생한다. 이 충실성, 주체화의 노력이 곧 윤리적 사건이다. 타자와의 대면에서 발생하는 이 현장적 충실성은 사회화된 믿음으로서 세상에 완강하게 기입되어 있는 '율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웃은 '너희는 세상에 속해 있지만,나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존재다'라는 예수의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웃은 인터넷으로도 검색되지 않으며, 동사무소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문장을 주체의 윤리학을 담은 하나의 시적 문장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나는 이 문장의 속내에 '너는 이웃의 윤리학을 너의 몸이 배우고 구현할 수 있도록 사랑하라'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본다.
이웃의 윤리학이 있다면, 유일한 원리는 누구든 ‘제대로 살아있도록’ 존중하고 돕고 기도해 주는 것이다. 이때 이웃은 공간적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계기에서 발생하는 존재 사건이다. 신앙의 사건이 아니라 현실의 사건으로 구세주-메시아를 읽을 때, 나는 예수가 소개한 '이웃' 사마리아인이야말로 돕는 자이고 '구원'하는 자라는 점에서 메시아적 윤리에 충실한 존재라고 느낀다. 여기에서 구원은 타인을 위해 애씀으로써 제 존재의 들어올림이 가능해지는 실천이 된다. 사건으로서 ‘이웃’은 명사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발생하고 자기구원에 참여하는 수행적 동사다.
캐롤을 듣는 시간은 다른 공간을 연다. 나와 너는 '우리'로 묶여 다른 곳으로 인도된다.
그곳에는 동사로서의 '이웃'이 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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