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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Mar 15. 2019

파도 타는 시간

친구야 그 분이 오신다. 무언가를 기다릴 때는 이들처럼

인간은 발을 디디고 서는 존재


'인간은 발을 가진 존재'라는 헤시오도스의 규정은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 된 정의 중 하나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보다도 먼저이고, 인간을 어진 존재라고 이해한 동아시아의 공자보다도 오래되었다.  


기원 전 7세기 즈음에 씌어진 헤시오도스의 시 일과 나날 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에서 '발'은 인간이 '땅 위에 발 딛고 서 있다'는 뜻의 메타포로 쓰인다. 행간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신은 하늘에 살지만 인간은 땅에 산다는 고대적 형이상학이 그 하나이고, 인간은 땅 위에서 일하며 사는 존재라는 뜻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라고 규정한 맑스의 규정은 매우 유명한 근대적 정의이지만, 인간 정체성을 '일'과 결부짓는 것은 낙원에서 쫓겨나 척박한 땅에 던져진 존재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아주 오래된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헤시오도스에게 노동은 아주 오랜 옛날 '황금종족' 시대를 지나 '철의 종족' 시대를 사는 현생 인류의 숙명이며, 땅은 이 숙명의 터전이다. 일을 통해 세계를 규정했기에, 그에게서 시간은 역시 일을 통해 규정되고 조직되며 운동한다. 해와 달과 별의 운행과 계절의 변화는 농부의 파종과 수확 시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세계의 섭리는 인간의 운명인 노동의 질서를 잘 따르는 것이며, 이는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가 된다.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나날의 노동 시간에 충실한 것이 곧 세계의 섭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구에는 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구의 훨씬 많은 부분은 땅이 아닌 물, 그 중에 바다로 되어 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땅 위에 있는 존재들보다도 더 많은 생명들과 무생명들이 이루는 넓은 세계가 있다. 땅도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바다의 일부가 융기한 것이며, 바다가 증발한 흔적이다. 생명의 원천도 바다이며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거기에 있다. 궁극적으로 바다는 우주로부터 비롯된 시간의 역사가 가장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는 공간이다. 인간이 발 딛고 땅에 선다는 것은, 그 관점으로 보면 46억년 지구 시간에서 지극히 짦은 육지 생명체의 시간, 그 중에서도 눈 깜빡할 순간에 불과하다고 할 직립보행 생명체의 유한함을 뜻할 뿐이다. 하지만  '발'을 가지고 태어나 무언가를 그 발로 디디고 살아야 하는 인간 조건, 다시 말해 중력에 종속된 유한한 육체 조건은 땅 외의 존재를 '여분의' 세계로 생각하기 쉽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에는 땅이 무너지는 걸 하늘이 무너지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적 관념이 들어 있지 않은가.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


발을 가진 인간이 딛고 설 수 있는 것은 땅, 즉 지속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고체의 표면이다. 그런데 지구에서 인간이 이 육체조건의 예외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있다. 고형체가 아닌 '액체' 위에 발 딛고 서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시간. 바로 서핑하는 시간이다. 파도를 타는 시간, 그것이 지닌 물리적 특이성은 무엇보다도 이것이 지구 위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중력 체험과는 매우 다른 체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특별한 체험인가 하는 것은 예수의 기적 중에 사람들을 가장 놀래킨 일이 바로 예수가 '물 위를 걷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체험에서 핵심은 '파도'에 있다. 파도는 지구의 중력 현상에 대해 지구 표면이 일으키는 일시적 일탈이자 복귀의 반복적 드라마다. 파도는 지구와 달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연기적 힘인 '인력'을 인식하게 한다. 파도는 지구와 달 사이의 연기적 결과이자 지구 자전의 결과이다. 파도는 지구 전체의 물이 덩어리로 움직이는 거대한 조류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대기순환의 가시적 형태인 바람이 만든 유적 흐름이기도 하다. '파도를 탄다'는 것은 그 모든 지구 내외적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고, 거대한 '바깥'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움직임에 사람의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뜻한다. 발을 디디는 지평으로서 파도는 지구가 당기는 중력의 힘을 일시적으로 이기고 솟구치는 순 현상인데, 이는 달이 지구의 표면을 잡아당기는 힘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파도가 부서지며 떨어지는 것은 다시 지구의 중력과 자전력의 결과다. 서퍼가 파도를 인지히고 작은 발판에 의지해서 파도를 타는 순간은 이 거대한 우주적 에너지의 실체를 느끼는 순간이며, 그 흐름에 적절히 참여했을 때에야 두 발로 설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베테랑 서퍼들이 서핑을 스포츠가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라이프-삶'은 '생명'이고, 생명의 원천은 바다이며, 이 바다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바다의 현재 표정-파도를 만드는 힘은 우주로 열린 무한한 에너지의 교섭이며 역동이다. 그러므로 이 발 딛기는 땅 위의 발딛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 경험이 펼쳐지는 장이다. 땅 위의 발 딛기와 파도타기 발판 위에서의 발 딛기가 다름을 느끼는 강력한 몸 체험은, 서퍼로 하여금 땅 위의 지극히 인공적인 것들로 구축된 인간 가치의 협소함을 인식하게 한다. 동시에 그는 더 큰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친구야 그 분이 오신다


파도를 타려면 당연히 파도를 만나야 한다. 파도는 어디에 있는가. 바다에 있다고? 그러나 바다에 늘 파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퍼들은 '파도가 바다에 없다'고 단언한다. 파도를 타려면 파도를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은 사람이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는 다르다. 바다에 메시지를 전할 수도 없으며, 기다림의 대상인 파도와 서퍼가 평등한 관계에 있지도 않다. 비슷해 보이는 보드나 스키부츠를 신고 눈으로 덮힌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산의 곡면을 따라 활강을 할 수 있지만, 서핑은 바다가 선물처럼 파도를 보내주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동력원 아니라, 일어나 움직이는 파도 위에 사람이 '타는' 일이다.

서퍼의 마음은 어부가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과도 다르다. 어부에게 파도는 위험한 대상이고 기피의 대상이다. 그에게는 바다가 노동의 터전이고 수확할 것이 있는 '농토'다. 그가 뱃머리 갑판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작은 발판 하나에 발을 딛고 선 서퍼의 발 디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서퍼에게 바다는 도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바다에서 땅으로 무언가 가지고 갈 것이 없으며 원하지도 않는다. 파도 위에 있는 시간은 '이후'를 기약하거나 저축하거나 기획하지 않는 시간이다. 의지할 과거도 없고 기약할 미래도 없다는 점에서 온전히 원초적인 시간의 현재성만이 구현된다. 파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래서 오직 현재라는 육체성에 집중려는 이들의 간구 같다. 그 대상이 원초적이고 목적이 무용하기에 그 간구는 마치 예술가의 기도 비슷한 게 된다.

S.R. 바인들러 감독의 서핑 영화 《헬로우 서퍼 Surfer, Dude》(2008)가 코메디 영화라고 할 만큼 서퍼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의 마음이 아주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전설적인 서퍼 에딩턴(매튜 맥커너히 역)은 하염없이 파도를 기다린다. 영화는 파도를 타며 성장하고 평생 제 삶의 에너지를 파도타기를 통해 확인하던 서퍼가, 열흘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나고  쉰날이 넘도록 파도 없는 바다를 쳐다보다가, 시름시름 앓으며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파도를 기다리는 그의 의식은 육지, 아니 이 세상에 없는 듯이 보인다. 그는 바다에 제사를 지낸다. 좋아하던 대마초도 끊고 연애도 안 하고 마침내는 단식을 하며, 파도를 기다린다. 바람이 부는 기미가 생길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에게 이것은 흡사 '그 분(신)'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이며, 그들의 무리는 우스꽝스럽지만 '컬트적'('컬트cult'는 '종교숭배적' 함의를 지녔다)이다. 파도가 찾아올 때 그들이 주고받는 인사는 그래서 '친구야, 그 분이 오신다'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업화하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이 세상에 흥미가 없는 듯이 보이는 이 히피 서퍼는 이미 '스포츠'가 된지 오래된 서핑이  이제는 게임회사의 가상체험으로까지 흡수되어 가는 세태에 힘겹게 저항하면서 온갖 생활고를 겪는다. 영화는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이 파도 타는 시간의 일부임을 유머러스하게 전달하려 하지만, 이 기다림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공할 압력 속에서 온전하고 순수한 기도의 시간으로 보존되기 어렵다. 사회라는 통속성은 서퍼라는 순수한 영혼-염원을 비웃는다.


패트릭 스웨지와 키아누 리브스가 서퍼로 등장하는 영화 《폭풍 속으로 Point Break》(캐스린 비글로우 감독. 1991)에서 서퍼들은 그래서 자신들을 적극적인 정치적 컬트로 전환시킨다. 그들은 온전한 우주적 에너지와 합일하며 사는 자연스러운 삶을 철저히 파괴하는 인공시스템의 지배자인 시장-국가에 맞서 '악법'을 파괴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것이 현대적 서퍼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연의 파도를 기다리기보다는 그들 자신이 세상을 뒤엎을 새로운 정치적 뉴 웨이브(new wave)가 되기를 바란다. 급진주의적 정치구호로 무장한 서퍼들은 갱을 조직해 은행강도 짓을 하며 서핑으로 정체성과 팀웍을 다지며 산다. 그들은 일생에 단 한번 만날까 말까 한 거대한 파도를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범죄가 드러나 추적을 받자 일생일대의 파도가 들어오는 폭풍 속으로 보드를 타며 사라지는 주인공 보디(패트릭 스웨이지 역)의 행각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엔딩씬은, 서핑이 내포한 저항적 에너지에 대한 도발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참여적 우주가 열리는 시간


하지만 선물처럼 '그 분'이 온 걸 안 서퍼에게 파도는 친절한 존재가 아니다. 선물 같은 파도는 실은 더 난폭하다. 파도를 영접하러 가는 길은 설렘 속에 시작되지만 서퍼에게 정신적 집중력과 헌신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아주 멋진 파도를 맞이하려고 한다면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판 하나에 의지한 인간의 몸은 망망한 바다 지속적 숨쉬기 같은 역동 속에서 위태로워 보인다. 그래서 파도를 타다 죽은 한 유명한 서퍼는 '당신이 가장 멋진 파도에 올라타려면, 궁극적이고 영원한 평화를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설적인 서퍼 제이 모리아리티의 실화를 담은 성장 영화《체이싱 매버릭 Chasing Maverick》(마이클 앱티드 감독 2012)은 서퍼가 파도를 타기 전에 우선 바다로 나아가며 파도를 맞이하러 가는 시간 자체가 위태로운 도전의 과정임을 생생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파도가 가장 높이 일어서 있는 정점의 한가운데에서 바다와의 가장 생생한 조우를 원하지만, 파도는 중심으로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이 접근의 시간은 인간에게는 싸움의 시간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싸움의 대상이 파도가 아니라 파도에게 접근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파도는 애초에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를 '기쁘게' 맞이 하는 일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발판을 배에 깔고 작은 손을 쉴새없이 움직이며 큰 출렁임에 몸을 맡기며 넒은 바다로 나아가는 인간에게 이 영접은 거대한 높이로 일어선 존재와의 조우라는 점에서 두렵기도 하다.


싸워야 할 것은 두려움뿐만이 아니다. 내 안의 조급성과도 싸워야 한다. 바다로 나아갔으나 모든 출렁임에 내가 올라탈 수는 없다. 가장 적절한 움직임을 잡는 데에는 아주 짧지만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이 다시 필요하다. 시선은 아직 존재가 나타나지 않은 먼 곳의 수평선에 머문다. 그 순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하늘도 보이고, 구름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오며, 하늘을 나는 새들, 어제와는 다른 바다의 표정과 해변 모래의 이동상황까지 감지할 수가 있다. 시선이 먼 곳에 머무는 이 순간은 찰나적이고 정적이지만, 주변 자연의 미세한 변화가 드러나는 예민한 시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존재의 시간'이다. 파도를 많이 타 본 숙련된 서퍼에게만 나타나는 이 순간은 파도타기가 주는 예상할 수 없었던 덤의 선물이며, 인생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요한 얼굴과 마주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작은 발판에 의지하여 바다로 나아가서 이 놀라운 정중동의 시간과 조우했다면, 그 다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파도를 타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은 지구와 지구 바깥이 긴밀한 연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당신 또한 이 에너지 사슬의 한 고리임을 기쁘게 지각하게 되는 '참여적 우주'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심의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기획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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