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0일의 섬머>에서 여자가 남자를 '친구'라고 부를 때
잘 모르겠는데, 인정해야 할 것 같아. 썸머를 사랑해. 그녀의 미소를 사랑해. 그녀의 머리칼이나 그녀의 무릎도 사랑해. 목에 있는 하트 모양 점도 좋아하고. 그녀가 가끔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것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웃음소리도 좋고.
- 영화 <500일의 썸머> 중에서 톰의 대사
이것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는 전형적인 시선이다. 그녀의 그 무엇이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빠져' 있는데. 그런데 이 대사에는 미묘한 지점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의 묘사 초점은 그녀의 육체에 머물러 있다. 미소, 머리칼, 무릎, 목, 입술, 웃음소리......
그런데 마음은? 여자의 몸 그 어디에도 남자의 하트가 날아가 닿지 않는 부분은 없다. 반면 남자는 그녀의 진짜 '하트' '심장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녀의 피가 뜨거운지도 그는 모른다. 그녀의 머릿속 세계를 파악하는 일에 대해서도 무능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사랑은 여자의 '진짜' 마음, 진짜 생각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와 그녀의 마음과 생각이 똑같다고 여기므로.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상황을 주체가 거울단계(mirror stage)를 반복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타자를 '나'의 거울처럼 오인하는 심리 상황 말이다.
이 대사는 사랑의 몰입성에 관한 한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그 전형성이 또한 얼마나 표면적인 것에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 창이라고 다 철갑을 뚫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 달아오른 사랑의 창은 육체를 부드럽게 두르고 있는 피부 내부로도 진입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거나 미끄러져 나간다. 똑같이 심장이 뛰지만 그 싸이클이 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주기로 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몰입된 시선에 그 나와 타인의 차이는 보이지도 않으며 관심의 대상도 아니다. 그는 "사랑을 하게 되면 (똑같이) 느끼게 될 것"이라고 그녀에 대해 확신하기 때문이다. 남자의 몸이 여자의 몸에 닿을 때(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에도 닿았다고 확신하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정상적 프로세스라고 여기는 일, 이것은 연애사에서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옳고, 어떤 경우에 그것은 아주 나중에서야 착각으로 판명나곤 한다.
영화 <500일의 섬머>는 톰의 시선으로 좇아가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500일의 시간은 사건 발생 순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억하는 의미의 계열에 따라 선택적으로 재구성되고 교차편집된 의식의 흐름이다. 연애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플롯 구성은 연애의 현상학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함의를 지닌다. 마치 예술작품이 작가에 의해 창작된 후에 해석의 역사를 통해 작품의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무형의 의미 창작 시간이 발생하듯이, 연애도 당사자들의 사건 해석과 회상을 통해 일정하게 반복되어 다시 추체험 된다. 이 반복되는 추체험은 연애가 타자의 욕망과 관계된 일이라는 점에서 수수께끼를 동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며,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에게 여자가, 여자에게 남자가 서로 타자이지만, 욕망의 무형성과 가변성 자체가 수수께끼를 발생시킨다. 때로 욕망은 타인의 욕망뿐만 아니라, 내가 지닌 욕망조차 나 자신에게 분명치 않으며, 스스로에게조차 대답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된다. 즉 연애에서 '의문부호', '해석' 욕구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이 욕구는 연애 당사자 양자 모두에게서 공히 발생하는 일이지만, <500일의 섬머>에서는 '실연'을 경험한 남자 주인공 톰을 시점의 주체로 삼았으므로, 실패의 이유를 알고 싶은 해석적 욕구는 영화의 플롯을 추동시키는 더 강력한 에너지로 작동하며, 수수께끼는 대부분 톰이 제기하는 의문부호와 그의 질문에 대한 친구들과 어린 여동생의 문답으로 채워지곤 한다.
영화는 해피엔딩이 되지 못한 연애의 결말을 먼저 알려주면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스크린 위에 날짜별로 다이어리 기록처럼 펼쳐지는 얘기는 톰의 '회상'이자 톰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의미의 계열이며, 실패한 연애에 관한 그의 '해석'이다. 첫 머리에서 그가 그녀를 '나쁜년(bitch)'이라고 말할 때, 이것 역시 톰의 규정임은 물론이다. 원망이 덧붙여진 해석이란, 이것에 강력한 시각적 일방성이 개입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시각적 일방성이 연애의 당사자가 된다면 우리 모두가 벗어나기 어려운 연애의 일반적 존재 상황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무대 위에 있을 때 그는 대본의 전체를 연기할 수 없으며 세계를 조망할 수 없다. 그는 자기 관점적 존재로서만 그 자리에 설 수 있을 뿐이다. 톰이 '운명적 사랑'을 믿는 존재라고 할 때, 이는 그가 단지 낭만적 사랑을 믿는 순수하고 특수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특별한 생의 '우연'을 의미화 하는데 무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만남의 우연성이 펼쳐내는 예기치 못한 촘촘한 에피소드와 저항하지 못하는 에너지를 우리는 여러 개의 시점으로 통합하여 이해할 수 없으며, 다만 의미의 '필연성'을 '일방적으로' 단단히 단도리하면서 안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운명적 사랑'은 다른 식으로 말해서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생의 신비와 마주한 주체의 속수무책 상황을 뜻한다. 톰과는 다른 연애관을 지녔던 썸머가 톰과 헤어진 후 다른 연애 상대를 만난 후 오히려 그제서야 운명적 연애관을 믿는 가치관의 역전을 보이게 되는 것도, 유한한 인간 존재가 예측불가능한 삶에 마주하면서 갖게 되는 일반적 경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 연애를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방해 놓았다. 톰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에피소드들로 인해 그의 관점에 관객이 우선 감정이입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관점을 따를 때 가장 문제적인 키워드는 단연코 '친구'다. 일상의 상당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섹스를 하는 사실상의 연애 관계이지만, 썸머는 둘의 관계를 '친구'라고 규정한다. 톰은 이 '무국적'의 관계 규정을 받아들이려고 애쓰지만, '친구'라는 단어가 모호하기 짝이 없는 영역에 던져진 안개 같은 말이라는 것을 감각하고 그 불안정성에 몹시 괴로워한다. 그가 보기에 '친구'는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 관계의 무책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친구'에는 관계의 패턴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예측가능성을 담보할 일관성이 없다. 대체로 연애에서 이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연애 대상에 대한 '헌신' '독점' '소유욕' 같은 것들과 관련을 맺는다. "우린 커플이야. 친구는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아. 어떤 관계에도 일관된 무엇은 필요해!"라는 톰의 분노 섞인 하소연은 정서적으로 이해할 만하다. 이후에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톰과 재회 후 그를 파티에 초대하고 커플 춤을 춘 썸머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냥 하고 싶어서"라고 썸머는 대답하는데, 이것은 톰의 관점에서 썸머의 '친구'라는 관계규정의 무책임성을 단적으로 어필하는 씬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썸머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운명적 사랑을 믿는 톰과는 달리 사랑 자체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여자다. 영화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정성껏 기른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에도 무덤덤한 사람으로 성장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어떤 관계 대상에 대해서도 그녀가 애착이 없는 사람이라고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욕망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욕망이 없다기보다는, '잘(쉽게)' 끊고 다시 '잘' 시작한다고 해야 할까. 이것을 흔히 '쿨'한 태도라고 부르는 그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사랑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관념'으로 고정된 상태나 관계의 명확한 규정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관계의 단단한 지속성이나 영원성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성향이나 인생관을 갖게 된 데에는 그녀 인생사의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욕망의 부유성으로 비판하기에는 지나치게 디테일한 고려들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톰의 시점으로 회상되는 영화에서 이 마음의 고려는 스크린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사려깊은 관객들이라면 미묘하게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의 연애가 중요한 분기점에 들어서는 대목에서 여지없이 나타나는 관계의 주도성을 썸머가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주목된다. 톰과 썸머가 최초의 의미 있는 관계 시작이 일어나던 날인 4일 째, 엘레베이터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던 톰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것도 썸머이며, 파티 후 길거리에서 자기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한 28일 째 에피소드의 주도자도 썸머다. 31일 째 되는 날, 회사 복사실에서 다가와 키스를 먼저 한 것도 썸머다. 259일 째 되는 날 썸머는 바에서 자신에게 추근덕 대는 남자에게 맞서 단호한 말싸움을 하지만, 톰은 개입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있다가, 썸머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감정이 폭발하여 싸움을 일으키고 만다. 그날 일은 톰에 대한 썸머의 신뢰가 결정적으로 깨져서 둘이 싸움을 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다시 찾아와 화해의 제스추어를 적극적으로 취한 것 역시 또 썸머였다.
'친구'라는 말의 모호성은 이런 점에서 톰과 썸머의 연애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달리 해석되고 있다. 톰이 '친구'라는 말의 명목에 사로잡혀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정서적으로 큰 불안을 느끼는 관념주의자라면, 오히려 사랑을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가벼운 연애주의자 썸머는 관계의 실질성을 발휘하고 현재라는 시간에 충실한 실천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실천성이 '현재'에 국한된 '순간주의자'라는 사실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녀의 순간주의는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입을 통해 누구에게도 감정적으로 예속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서"라는 '자기 주권자'처럼 선언되지만, 어린 시절 상처에서 비롯된 콤플렉스, 방어본능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래서 '친구'라는 개념은 썸머에게는 현재의 정서적 충실성을 발휘하는 반면 관계의 지속성을 은연중 회피하는 무책임성을 동시에 매개하는 모호한 단어다. 톰의 혼돈은 그런 점에서 이런 종류의 연애 관계를 경험해 본 숱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정과 사랑(연애), 또는 친구와 연인 간 경계의 모호성에 관한 질문은 현대적 의미의 '자유연애'가 발명된 이후,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 관계 영역에서 집중적인 수수께끼가 되어왔다. 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양자 모두 이런 관계성의 발생과 유지에는 친밀성, 열정(정념), 헌신(배려)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며, 이 요소들의 비율에 따라 구체적 양상이 달라진다고 한다. 정념의 열도나 빛깔에 따라 친구와 연인이 나눠지기도 하고, 헌신의 정도에 따라 연애와 사랑 간에도 미묘한 경계가 나뉠 수 있다. 어떤 경우 우정의 친밀성 강도나 헌신의 지속성이 연애 관계보다 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요소를 살펴보게 되면, 이것이 모두 마음과 몸과 정신적 차원의 상호 대화적 요소, 즉 소통과 공감에 바탕한 존재 이해라는 측면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의 과정이 부재하다면 연애만큼이나 우정도 가능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이것은 '이성'에 대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표현된 것이며, 실제 삶에 있어 생물학적 성으로서는 동성끼리의 관계를 포함한다)가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갖는 상투적인 오해 중 하나는 '우정'이나 '친구'가 연인이나 애인보다 존재론적으로 하위에 있거나 덜 강력한 관계라는 편견이다. 그러나 친밀성과 열정(정념)과 헌신(배려)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진정성이나 공감에 기초한 상호 이해가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연인만큼이나 '친구'라는 관계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사랑만 드문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우정의 발생도 지구에서는 드문 사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정도 사랑의 한 존재론적 양상으로 집중적인 철학적 토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연인이었던 관계가 몸의 정념이 식어 '친구가 되자'고 말할 때, 이것은 상투적인 차원과는 다른 의미에서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가 성립하려면, 혹은 그러한 존재 전환에는 그 나름의 대단히 중요한 전제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충분한 상호 이해와 신뢰, 공감이 그러한 요소다.
철학자 알랭바디우는 에로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양상과 차원에서 이뤄지는 진정한 사랑을 '진리'의 사건이 발생하는 영역으로 보았다. 그는 사랑을 우연적이거나 자연발생적 차원으로는 생길 수 없으며, 주체가 그 사랑에 참여하는 과정의 충실성(fidélité)이 반드시 발휘되어야 일어나고 유지될 수 있는 존재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사랑의 경이'는 에로스만큼이나 우정에 있어서도 주체의 헌신적 참여나 배려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톰은 그것을 연애라고 부르던 사랑이라고 부르던 이중의 차원에서 사춘기적 모자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썸머와의 만남을 '운명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며 그 만남의 경이로움을 숭배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솔직하지 못하며 그 만남의 관계성을 구체화하는 용기 있는 실행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 그는 썸머의 마음의 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는 소통 능력이 알게 모르게 상당히 부족하다. 톰은 사랑의 관계를 원하지만, 자신의 연애 파트너인 썸머의 취향, 썸머의 생각, 썸머의 미세한 마음의 이동 경로를 듣는 데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집착한다. 여기에서 욕망의 실제 양상은 썸머와의 관계가 아니라, 썸머를 사랑하고 있는 그 자신과의 나르시즘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톰은 썸머라는 타자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녀의 욕망을 마주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녀에게서 그가 원하는 욕망, 그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관계의 왜곡 양상은 반대로 썸머의 태도에서도 발견된다. 썸머는 톰보다 조숙하고 자기주도성을 지닌 주체 양상을 갖고 있지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서" 파트너를 자기 삶의 의미의 중심에서 굳이 유보적 위치에 놓는다. 썸머는 자기 자신의 현재 감정에 솔직하지만, 의미의 층위에서 타자를 그림자처럼 거느리는 방식으로 관계의 상호적 실체성을 진정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기중심적 태도로 인해 썸머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현재 긍정을 실천하기는 하지만, 감정의 자기부정을 반복하면서 관계의 지속성이 만드는 상호적 차원의 미래시간을 생산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현재' 기쁨 은 있지만, 관계가 빚어내는 시간적 협업의 전망은 부재하다. 톰의 불안증이 욕구 충족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히스테리컬 한 것이라면, 썸머의 '가벼움' '쿨'은 자연스러운 시간에 닫혀있는 무의식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강박증적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과 거의 모든 영화평론가들의 관점처럼 이 영화가 '500일의 썸머' 다음에 찾아온, 아니 이제는 톰이 용감하게 행동하여 선택한 '아텀(가을 autumn)'에 관한 새로운 만남을 예비하는 성장영화라는 건 지나치게 뻔한 얘기다. 그렇다면 이 로맨틱코메디가 해피엔딩이라는 말인가.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난 이 영화를 연애에 관한 성장서사라기보다는, '연애의 실패는 어떻게 우정에도 실패하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해석한다. 연인으로서 충실성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 이후에 그들은 '친구'도 되기 어렵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미학적 전위와 정치성을 결합한 문학ㆍ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문학평론에 집중해 왔다. 시민의 일상성과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하여 새로운 경험적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과 시민교육에 대한 관심 때문에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했고 대표를 지냈다. 진화한 미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실천하기 위해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 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ㆍ2019 여름의 책'으로 연속 선정되었으며,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상반기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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