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B사감을 이해하게 되는 시각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갔을 때 갑자기 어려워졌다고 느낀 과목은 ‘국어’였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작품들, 특히 초등학교 ‘동시’에서 ‘현대시’로의 점프는 내게는 버거운 수준의 비약이었으며, 이른바 본격적인 ‘현대시’의 논리를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교과서에서 만난 첫 번째 '현대시' 중 하나가 박목월의 「나그네」였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나그네」
한국의 학교 어느 교실에서나 있을 법한 풍경처럼 국어선생님의 ‘교과서적’ 설명에 반 아이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수업은 그대로 순탄하게 끝날 뻔했다. 그러나 내게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있었고, 선생님의 설명 이전에 시인의 시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들고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저는 저 3연의 논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가 써졌던 시기는 식민지 치하 말기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던 시절이 아니었나요. 보통의 조선인들은 당시 매끼 양식이 충분치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시절이었던 것으로 알아요. 그 당시 술은 쌀을 담가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양식도 충분치 않았던 고생스러웠던 시절에 어떻게 ‘마을마다 술이 익을’ 수가 있을까요. 이 시는 당시 민족적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나에게 학교의 사실상 첫 번째 '현대시' 수업 시간은 이렇게 반론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를 기억해 보면 나는 순진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이 시를 쓴 시인에게 화가 났던 듯하다. 그러나 난 국어선생님께 납득할 만한 해명을 듣지도 못했을뿐더러, 이후 학창 시절을 통틀어서도 이 시에 관한 설득력 있는 해명을 듣지 못했다.
누구나 한 번 즈음은 보았을 저 유명한 시에서 시인의 직관과 순진한 의협심으로 가득 찬 어린 학생 간의 생각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시인이 문제였을까, 학생이 문제였을까.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시인의 눈으로도 정의감 넘치는 순진한 어린 학생의 눈으로도 시는 써질 수 있다. 이는 시의 시간과 사회적 시간 사이에 난 간극에 대한 차이 인식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인식은 단지 나이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인간-삶의 복합적 시간성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어린 학생이었던 나는 “술 익는 마을”을 당시 문학의 유일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정황 차원에서 이해했으나, 시인이 직감한 것은 ‘술-저녁놀’이 맺는 상관성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의 직관이다. 시인이 서로 이어놓은 ‘술-저녁놀’은 역사적 층위 이전에 인간이 던져진 보다 일상적이고 상시적인 시간과 관련이 있다. 그 시각이란 언제인가. 낮의 시간이 저녁 시간으로 넘어가는 어스름, 아마 이 즈음의 계절이라면 해가 스러지고 이지러져 저녁놀로 번져가기 시작하는 오후 6시 47분 즈음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3연을 읽는 세 가지 독법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술이 익어가는 마을에 저녁놀이 불타고 있다’는 정황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어린 학생이었던 내가 읽었던 방식이다. 이는 시의 현실을 생활의 현실과 관련하여 정황적이고 공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접근법이다.
둘째, 이미지의 차원의 독법이다. 이때 ‘술이 익는다’는 표현은 얼굴이 술을 먹고서 붉어지는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타는 저녁놀”과도 이미지 유사성 차원에서 연결될 수 있다. 그런데 시에서 이미지는 단순하지 않아서 이러한 식의 이미지의 연상은, 충분히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이미지가 내포하는 다른 삶의 진실과도 어렴풋한 조우를 돕는다. 이 경우 시인은 이미 술과 저녁놀 사이에 모종의 ‘화학적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지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셋째, “술 익는 마을”과 “타는 저녁놀”을 근원적인 실존 시간 지평에서 읽는 방식이다. ‘마을’에는 누가 사는가. 사람이 산다. 사람의 현실에는 역사의 층위를 넘어서 늘 지속되는 일상적이고 실존적인 현실이 있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 차원에 관계된 현실이기도 하다. 이 심리의 차원은 자각될 수 있는 차원의 시간보다 더 깊숙하고 야생적인 시간이라는 점에서, 흔히 ‘정신’이라고 질서화된 층위보다 더 내재적인 에너지로 구성된다. ‘술’은 그 야생적인 시간을 매개하거나 불러오는 촉매제이자 그 시간의 상징이다. 그 시간은 노동하고 기획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강력한 통제가 풀어지고 타자의 시선은 물론이고 의식의 자기 검열로부터도 어느 정도 놓여나는 ‘방심’의 때라는 점에서 ‘밤’의 시간이다. 이 방심의 시간에 인간은 제 안에 있었지만 자신도 몰랐던 ‘타자’들의 시간을 경험한다. 술의 시간은 밤의 시간이다. 술과 저녁놀은 이미지의 실존의 시간 층위에서 같은 지평으로 이어진다.
노을이 지는 오후 6시 47분을 그러므로 ‘여우와 늑대 사이’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이 지칭하는 바로 그 시간으로 보아도 좋다. 왜 ‘여우와 늑대 사이’인가. 해질 무렵이 여우인지 늑대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간이라는 어떤 이의 풀이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이 속담의 진실과 유리되는 얘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풀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풀이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 현실의 차원과 결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여우는 이솝우화 시절부터 통상적으로 늘 꾀가 많고 영리한 동물로 지칭되어 왔다. 늑대는 보다 야성적이고 통제되지 못하는 에너지의 층위를 떠올리게 한다. 서양에서 밤기운이 가장 충만한 보름달 뜨는 날에 본성을 드러내는 ‘늑대인간’의 이야기가 바로 이와 관련이 있다.
‘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은 ‘여우와 늑대 사이’의 그 경계 시간이다. 여자는 여우이고 남자는 늑대라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여우였다가 늑대가 되며, 여우이자 늑대라는 이중 현실을 산다는 걸 감지하게 되는 경계가 6시 47분이라는 얘기다. 이 시각이 되면 학생들의 연애편지를 압수했던 엄격한 도덕률의 표상인 B사감도,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한 명의 평범한 여자가 된다. 타인의 시선이 사라진 한밤의 방에서는 누구나 제 안에 낮과는 다른 타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점에서 현진건의 소설「B사감과 러브레터」를 지금도 ‘풍자 소설’로 배우고 가르치는 국어시간은 보다 근원적인 시간성의 관점에서 수정될 필요가 있다. B사감은 풍자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저녁놀이 도래하면 누구나가 살게 되는 자연스러운 인간 시간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밤과 술이 이해되어야 하듯이 B사감은 이해되어야 할 존재다. 그는 늘 경계를 사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6시 47분은 인간이 분열되는 시간이 아니라, 진실이 회귀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퇴근길에 이 진실의 시간을 노을을 보며 걸어 보라.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박목월 #나그네 #현대시 #노을 #여우와늑대사이
세번째 사진. 가수 조동진(제주 풍경)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 전문가그룹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의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실험적 사회디자인대학을 설계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고전 과목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교육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교육ㆍ문화예술기관, 기업연구기관 등에서 인문예술교육과 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서울시도시건축포럼준비위원회 자문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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