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클럽에 가입해야 하는 지금의 나와 미래의 너에게
신입 사원이 고통받는 이유
대기업이라는 생태계에 몸담은 세월을 이제 한쪽 손으로만 꼽을 수는 없게 되었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통과 의례처럼 많은 새내기들이, 과거의 나처럼 상상과 현실의 온도차에 몸서리를 쳐대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회사나 부서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회사 생활은 곧 인간관계 그 자체라서, 원하지 않는 '단합을 빙자한'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이미 널리 알려진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에 따라 인간관계에 고통받기도 하며, 심한 경우 상급자의 폭언과 난폭 행위에 다시 군대에 입대한듯한 정신 착란이 생기기도 한다. 잦은 업무 검열과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압박, 반복되는 미팅 등등등... 정신적 외상의 요소는 정말이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는 어떻게 변온 동물이 되었는가
나도 별 수 없이 입사한 지 1년 만에 셀 수 없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의자 바퀴를 발로 걷어찬다든지 위협을 받을 때도 있었고, 상급자가 폭언을 일삼는 것은 일상 다반사였다.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치욕스러운 (고소를 해도 될만한) 모욕을 당한 적도 있다. 2년 차 땐 그렇게 할 거면 사표를 쓰라는 얘기도 들었고, 어느 정도 업무에 적응할 때가 되니 주변 부서에서는 '쟤 곧 그만둔다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만 둘 생각 없는데.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에에에에? 그런 회사가 있어?'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의 회사는 레드 오션의 바다를 헤엄치지 않는 안정적인 회사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혁신적이기로 유명한 회사이거나, 또는 정말 리더가 아무 생각 없이 한량인 회사일 경우일 것이다. 쉽게 말해 기업 문화가 아름다운 회사는 '아주 보통의 회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장르와 강도만 다르지 비슷한 수준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어있다.
어쨌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단 하나였는데, 바로 내 탓이었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제게 욕하시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걸요'와 같은 식의 자위.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부수고 깨지고 열 받으면 다이아몬드가 된다'며, '다이아몬드가 돼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고 술에 취해 소리친 날. 그 무섭던 선배 사원들이 기특하다는 얼굴로 나의 건배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렇게 3년 차가 되었을 즘에 나는 직책자들에게 어느 정도 쓸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중견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회사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선배들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지냈고, 어쩌다 그때의 일들이 다른 이로부터 회자될 때면 '그때의 일이 있었기에 제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며 먼저 그 일을 합리화해주었다. 그들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예전 일에는 전혀 앙금이 없다는 듯, 그리고 심지어 그런 가르침에 고마웠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덤. 나는 그렇게 변온동물처럼 회사의 추위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교활한 체제 수호자
얼마 전, 동생처럼 아끼던 후배 사원이 고민 상담을 요청하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게 건네었을 때. 선배들 앞도 아닌데 우습게도 내 입에서는 프로그래밍된 말 들이 쏟아져나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것이다.. 나도 그때는 너무나 괴로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똑같다. 어딜 가면 똑같지 않겠나, 상급자들이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거다라는 식의 말들.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견디기 위해 합리화했던 시간이. 나로 하여금 그 일들이 옳은, 혹은 당연히 지나가야 하는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지게 한 것인가라는 생각. 후배의 미래와 가정을 걱정해준다는 이유로 (내가 정말 그걸 걱정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불합리한 고통을 '견딜 가치가 있는 것들'로 후배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나 자신의 안일한 모습.
나를 인간이 아닌 변온 동물로 만든 그 수많은 선배들처럼, 나 역시 후배를 변온동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교활한 체제 수호자로서 이 그릇된 생태계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이 [파이트 클럽] 의 테일러 더든이 될 수는 없어도, 타인까지 바보를 만들어서는 안되는데 문득 두려워졌다.
나의 노력(?) 덕분인지 여전히 후배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이 나의 인식에 도달했을 때, 나의 조언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는지. 그즈음의 그 녀석이 나를 비판조차 할 수 없는 동류가 되어 있을까봐 '값싼 조언을 이제 남발하지 말아야겠다'는, 공허한 교훈만을 마음에 새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