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라라랜드를 보고
라라랜드를 뒤늦게 봤다. 통속적인 멜로 이야기라서 전개가 색다르단 느낌은 없었다. 다만 음악과 연출, 연기, 라이언 고슬링의 수트 핏 순서로 이 영화가 좋았다. 뭐 그다지 인생 영화 느낌은 아니라, '왜 그토록 호평 일색이었을까?' 하며 의아하긴 했다. 역시 음악과 사랑의 힘이 아닐까.
영화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은 미아가 남친과 식사하다가, 우연히 'City of stars' 가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고 그대로 영화관으로 달려가 세바스찬을 만나는 시퀀스다. 이 부분은 문득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의 다음 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불리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이 그것이다. 예기치 않은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조우하는 순간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스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 같은,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완전히 모르는 채 흘러간다. 토마스 대신에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사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베토벤과 푸줏간 주인과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지만). 그러나 막 싹이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녀는 이 음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했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이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이 책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외울 정도로 몇번이나 다시 읽었던 부분인데, 영화의 이 시퀀스에서 나는 책의 이 내용이 오마쥬로 활용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뭐 로맨스물에 등장하는 흔한 클리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미아가 처음 세바스찬에게 호감을 느끼는 순간은, 우연히 거리에서 City of stars 를 듣고 그가 일하는 가게에 들어가 그의 연주를 들었던 때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음악 때문에 다시 세바스찬을 찾아가고, 그와 함께 이 음악을 악보 삼아 노래 부르고, 마침내 관계의 끝에 이르기까지 이 음악 속에서 그와 교감한다.
라라랜드가 헐리우드와 고전 영화에 바치는 헌사라는 평은 많지만, 그보다도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발자취는 늘 음악에 대한 경의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든다. 얼마나 많은 음악들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우연히 사랑을 파란빛으로 물들이고, 또 삶의 페이지 속에 켜켜이 배경 음악으로 남아 함께 기록되어 있는가?
뒤돌아 세바스찬을 응시하는 미아의 시선. 그 시선이 거둬들여진 후 그 기억 속에 오직 남는 것 또한, 아마 그 슬픈 음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