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백수지만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_00 프롤로그

오늘도 부유하는 중입니다

by 고라니

전업백수? 그런게 있던가? 있다. 나.


전업백수는 크게 두 분류다.

남은 여생 일 없이 살아도 되는 파이어족, 그리고 취업이 안 되거나 하기 싫어서 가끔 짧게 일하며 인생을 연명하는 사람. 둘 중에 고르라면 나는 후자다. 그런데 '연명'이라는 단어에 조금 자존심 상한다. 이렇게 사는게 좋다, 쭉 이렇게 살고 싶다. 언제 죽더라도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살 떨리게 좋은 것도 없지만, 처절하게 암담한 것도 없다. 중간 어딘쯤에서 부유하는 기분이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소속은 스스로 정하면 된다. 꼭 그것이 회사 건물이나 밥벌이 모임일 필요는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기보다, 결정하기 나름이다.


파이어족이 되어 멋진 퇴사를 꿈꾸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시작되며 '퇴사'만 남았다. 내가 가진 무형의 경험과 유형의 기술은 세계적인 전염병 앞에서 쓸모없고 하찮았다. 화났고 절망했다.


남들이 시대에 맞춰 새로운 도약을 시도할 때, 나는 혼자서 모든 걸 걷어찼다. 취업 시장과 관련된 문은 모두 닫고, 방문도 닫았다. 옆에 고양이 한 마리만 남겨둔 채 인간 관계도 닫았다. 답도 없는 독백을 하며 글쓰기는커녕 읽는 것도 안돼서 인생이 망했단 생각에 죽고 싶었지만 책임져야 할 고양이와 사면 떨어지는 주식이 어이없어서 실행하지 못했다.


처음 6개월은 못 본 한국 드라마를 전부 봤다. 행복한 드라마를 보면 배알이 꼴렸다. 슬픈 드라마를 보면 종일 대사를 곱씹으며 울었다. 존재를 원망하는 건 쉬운 일이다. 감정에 총질량이 있는 건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전두엽과 뇌신경망들이 파업했다. 화장실 가는 일조차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병증에 가까운 아니, 병증인 '백수 부정기'.


정신의 골절은 겉으론 안 보이지만 회복엔 시간이 걸린다. 마음의 재활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는 여전히 전업백수다. 다만 그때와 다른 건 이제는 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 졌다는 거다. 어떻게 이렇게 사는데도 무너지지 않는지, 그 나름의 방법이 있다는 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씻어 내는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