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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투티 Jan 22. 2024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 [1]

과정에 관하여




지난 편,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

코로나 상황에서 기숙사 내 잦은 이사로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소설 쓰기를 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법은 아닐 게 분명한데, 아마 그건 소설 쓰기를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어서일 것이다. 요즘 늘어나는 웹소설을 보면 또 그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마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플랫폼 덕에 기회가 많아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글쓰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영화 보기, 자전거 타기, 그림 그리기가 즐겁다는 사람을 더 많이 봤다. 어쨌든 나 같이 방 안에 박혀 있는 걸 좋아하면서, 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코로나 덕분에 그게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나의 글을 처음 본 사람들을 위해 얘기하자면, 나는 체코에서 유학생으로 지냈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12월 31일 밤, 몇 시간 전부터 기숙사 복도가 떠들썩했다. 오랜 셧다운 동안 외로움에 미친 기숙사 학생들이 새해가 다가온다고 복도를 파티장 삼아 나와 놀았다. 2명 이상 다니면 안 된다는 정부 명령이 내려온 상태였다. 31일 밤 11시 59분 50초. 학생들은 10부터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복도에 숫자 세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무도 올라와서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문은 꼭 잠그고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왜냐? 나는 만리타국에서 코로나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싶지 않았다. 여담으로 내가 너무 조용히 살아서 내 옆방 학생은 사람이 살지 않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럴 만 하지. 나는 노래를 크게 듣지도 않았고, 전화를 오래 하지도 않았고, 친구를 방에 초대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옆방에 들리게까지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 것은 내게 오히려 스트레스다. 전화를 오래 하면 기가 빨린다.



다행히 날이 따뜻해질수록 체코의 확진자가 줄어들고 코로나 규제도 약화되었다. 코로나 음성 결과가 있으면 몇 개 국가는 국경을 넘어서 갈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국경마저 닫혀 있었는데, 이 정도면 많이 완화된 것이었다. 12월 말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7월초까지, 소설을 쓰면서 지냈다. 손으로 직접 썼다. 컴퓨터로 쓰면 눈이 아프기도 하고, 딴짓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시력이 많이 나빠서 컴퓨터에 바로 썼다가는 정말 심각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다 보니 그렇게 빠르게 쓰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스토리를 구상하고 그것을 글로 써 내는 것이 머리가 아프고 재밌었다. 머리가 아픈데도 그렇게 순수하게 재밌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감각을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게 유치원 시절 그림을 그렸을 때였던가, 레고로 마을을 만들겠다고 몇 시간을 방바닥에 앉아있을 때였던가, 영하의 날씨인데도 눈이 온다고 친구랑 밖에서 손발에 감각이 없을 때까지 놀았을 때였던가.



체코에 오기 전에는 SNS 덕분에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SNS 속에는 이미 이룬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눈으로 읽고 보고, 자극을 받는 소비자였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을 만큼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많은 것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이뤄 보고 싶다는 동기는 또 생겨서, 자기계발 유튜브 영상을 많이 봤다. 그 중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말이 바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 보라는 말이었다. 그 밖에도 내가 무언가를 만들도록 부추긴 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건이 중첩된 것이다.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야지. 이렇게 소비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소비자로만 지내는 것은 지갑에서 계속 돈을 빼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생산자가 되려면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SNS는 여러 개인데, 각 SNS마다 성격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다 시도해보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에는 요리한 사진을 올렸고, 유튜브에는 체코에서 여행한 것, 겪은 것에 대한 짧은 영상을 편집해서 올렸다.



둘 다 실험에 그쳤다. 그러나 시도해 보길 잘 했다.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뭐. 안 된다고 패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 더 배우는 거야. 그런 마인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었다. 마인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그 마인드의 지분이 0.1퍼센트씩 늘어난다.



어쨌든, 유튜브 영상은 편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 과정이 즐겁지 않았다. 눈도 아팠다. 인스타그램은 올리는 데 시간이 적게 걸리지만 쓸 말은 많은데 인스타는 사진 중심의 매체라서 무언가 부족했다. 그래서 가장 나중에 시도한 것이 블로그였다. 사진도 많이 넣고, 글도 많이 쓸 수 있는 매체였다.



이 때부터 나는 프로젝트라는 것에 눈을 떴다. 그 때는 프로젝트의 정의가 모호했지만, 이 시점에서 나만의 정의를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적은 부담과 함께 반복적으로 비슷한 행동을 하며 쌓아가는 실험의 장. 이것은 평가받는 일이 아니며 실수도 실패도 없다. 그런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는 다음 프로젝트로의 길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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