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체코에서 1년 유학하기 [3]는 체코 기숙사에서 겪은 기상천외한 일들에 대해서였다. 방을 다섯 번 옮기고, 외부적인 이유로 방에서의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런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가볍게 말하자면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언가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글들에서 여러 번 언급했던 소설 쓰기였다.
체코에 와서 내가 직접 계획해서 쓰는 시간이 많아지자 나는 판타지 소설을 한 번 써 보고 싶었다. 일 년 동안 무엇이든 결과를 내고 싶었다. 10월과 11월은 플롯을 짰다. 12월 말에 드디어 독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이제 정말 소설 쓰기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미 짧은 글을 쓰는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리된 스토리를 가지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인공들의 서사를 이어 가기로 했다. 안 되도 괜찮아. 멋지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이어 가자. 라고 마음먹으며 썼다.
해가 일찍 지고 체코는 완연한 연말 분위기였다. 나는 한 달 전부터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낼지 구상했다. 이곳의 다이소 격인 플라잉 타이거에서 미니 트리와 미니 전구를 샀다. 코코아도 샀다. 많은 체코 학생들이 크리스마스 며칠 전부터 고향에 돌아가 기숙사가 비었다. 먼 외국에서 온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기숙사가 조용해서 좋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낮에도 눈이 와서 하얗게 어두웠다. 하얀데 어두울 수가 있다고? 그건 먹구름에 해가 가려져 있는데 온 새상은 눈으로 뒤덮여 있을 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켜고 코코아를 마셨다. 눈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체코의 겨울은 조용하고 외롭다. 많은 유학생들이 크리스마스 때 힘들어한다. 그런데 기숙사에 남은 나는 오히려 사람들로 꽉 찼던 삶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은밀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까지 겪지 못했던 무언가 시작될 듯 설렜다. 실제로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6일의 밤. 첫 번째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마침내 오랫동안 마음 속에서 수백 번 상영했던 그 장면을 활자로 써 내려갔을 때, 수백 번 다시 볼 수 있는 하나의 글이 되었을 때, 나름의 논리가 부여되었을 때, 나는 웃고 있었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느낌을 절대 잊지 말자. 오늘을 잊지 말자.
그때 느낀 전율은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전율이었다. 내가 하는 과정이 즐거우면서, 누군가에게는 긍정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 때.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났을 때. 그 때 나를 살린 것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나는 또 다른 나 같은 사람이 하루 더 살아갈 힘을 내 소설을 보면서 얻었으면 좋겠다. 책의 다음 한 장을 더 보기 위해 하루 더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버텼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 한 화를 더 보겠다고 하루 더 살아서 썩은내 나는 시간을 버텼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진짜 바람이다.
나랑 비슷한 성향의 청소년은 외로운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을 수 있다. 버티자. 성인이 되고 경제적으로 자유가 생길 때까지. 마침내 스스로를 찾을 때까지. 현실이 아닌 것에 기대어야만 버틸 수 있다면 기대자. 좋은 이야기는 사람을 살아내게 한다. 나는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버티게 해 주는 이야기를 써 낸 사람들 덕에 나는 살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