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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투티 Oct 23. 2023

체코는 무슨 언어를 써? [1]

허공에 외치는 기분



체코어는 내 메이저, 그러니까 전공이지만 세상에서는 마이너한 학문이다.




체코어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고등학생 때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몰랐는데 갑자기 앞으로 4년 동안 공부할 것을 정해야 했다. 그런데 무려 4년씩이나 공부할 흥미 분야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게 재밌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건 좋았지만 예술가나 소설가는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 쪽으로 나아갈 용기는 없었다. 아니 시도조차 해볼 기회가 없었다. 계속 의문투성이였다. 그냥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당장 정해서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 또래들은 목표 없이 달리는 법을 이때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대학을 간 친구들보다 점수 맞춰서 대학을 간 친구들이 더 많다. 대학을 가고 싶어서 간 것보다 가족들의 권유로 간 친구들이 더 많다. 요즘 2030청년들이 퇴사율이 높은 것에 이런 청소년기도 이바지하지 않았을까? 목표 없이 남들이 줄세워 놓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대학교 졸업하면 남들이 줄세워 놓은 기업에 들어가려고 또 달리고, 결국 번아웃이 온다.




가족들의 권유로 대학교에 간 게 어때서? 하지만 대학을 가지 않으면 무엇을 할 지 생각해 볼 기회는 가졌던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실험해 볼 시간은 가졌던가? 많은 고등학생들이 자아가 만들어질 시기에 학교-학원을 전전하며 산다. 물론 학원을 갈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채 소년소녀 가장이 되는 사람들도 많다. 공통적으로 청소년들이 중고등학생 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구할 시간이 적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시험을 보려면 잘 외워야 한다. 공부를 잘 하는 것, 외우는 걸 잘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예상치 못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신 공부는 잘 외우고 잘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선호가 강한 아이는 그것도 분명 능력인데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애들은 뮤지컬을, 어떤 애들은 실험을, 어떤 애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좋아하는 게 없었다. 공부하는 것 이외의 삶을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그나마 점수가 잘 나왔던 과목을 바탕으로 대학 학과를 정하기로 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점수를 잘 받아야 취업이 잘 된다고 하니까.




원래 삶은 이런 걸까? 우울한 아이는 그렇게 목표 없이 공부했다. 기이한 구조 속에서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주변 친구들은 인터넷 강의 강사의 영상이나 공부자극 영상을 보면서 동기부여를 받았다. 독해져라,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자 등등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상들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봐도 여전히 왜 독해져야 하는지 목표가 빠진 채였다. 백날 방 안에서 목표를 찾아봤자 나오지도 않는데, 목표 없는 상황과 나를 탓했다.




고3이 되면 어느 정도 타협이 된 상태다. 대학은 가기로 했고, 수능은 다가온다. 이왕 보는 수능에 점수라도 잘 받아서 내 선택의 폭을 넓혀 보자, 이 정도 타협점에서 공부를 했다. 수시 원서를 쓸 시점이 왔을 때 정말로 결정해야 했다. 어떤 학과에 들어갈 것인가? 4년 동안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문과니까 이과 계열은 아예 논외. 그나마 이때까지 점수가 잘 나왔던 과목은 언어 쪽이었다. 영어, 국어, 일본어. 그러나 대학교의 하고 많은 언어 중에서 어떤 언어를 고를 것인가? 수시 6개 학과에는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을 썼다. 그러나 수시는 전부 탈락. 절망할 겨를도 없다. 11월에 친 수능 결과로 3개 학과는 일본어, 프랑스어, 체코·슬로바키아어(이하 체코어)를 썼다. 마지막에 일본어과와 체코어과에서 합격 연락이 왔는데, 체코어과를 골랐다.




체코어과에 들어와서 체코어 하나 잘 해서 나중에 통역가 같은 걸 해야지. 전문적이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꿈을 안고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abc를 처음 배우듯 체코어 abc(아베쩨)를 처음 배웠다. 그리고 체코어 문법을 조금씩 배우면서, 내가 생각한 것과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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