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우카 Oct 30. 2021

연정(戀情) - 전남장흥선학마을

메밀은 땅이 박해도, 물이 귀해도 잘 자라기에 구황작물로 사랑을 받아왔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을 빌두로 최남단 제주에까지 메밀은 어디에서건 잘 자란다. 하지만 메밀을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메밀꽃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건 아마도 "메밀꽃필무렵"이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이효석이 묘사한 메밀꽃이 떠오르는 까닭아닐까?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낮에 흐드러진 메밀꽃을 본다.
소금을 뿌린 것보다 온통 팝콘을 터트린듯하다. 아니 눈송이가 쌓인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꽃송이가 여러겹으로 둘러쌓여 피어나는데 짙은 붉은 빛이 점점 옅어져 하얀색이 되어가나보다. 꽃송이하나에 이렇게 많은 작은 꽃들이 겹겹이 들어있을줄이야. 

선학동은 장흥이 고향인 작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 것이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다. 천년학의 영화촬영지로 알려진 유채꽃이 흐드러진 벌판위에 세워진 선술집이 바로 천년학 남녀 주인공들이 마지막 만남을 가지던 장소이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면 관음봉을 한 마리 학으로 물위를 떠돌았다.
선학동은 그 날아오르는 학의 품 안에 안겨진 마을인 셈이다. 
동네 이름이 선학동이라 불리게 된 연유이다.
-이청준, 선학동 나그네 중-

이청준의 소설도 임권택의 영화도 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 장소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메밀밭만은 그 느낌이 달랐다. 아마도 이효석의 영향이겠지.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은 탁월한 배경묘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밭이라든지 쏟아지는 달빛에 대한 묘사라든지 사람의 언어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그의 표현들은 하룻밤의 사랑만큼 풋풋하니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장돌뱅이로 살아가던 허생원은 하룻밤 정을 나누고 헤어진 처녀를 잊지못해 봉평장을 거르지 않고 드르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의 짐작되는 동이를 만나게 되고 동이를 통해 듣게된 출생의 이야기를 통해 동이와 함께 제천으로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하룻밤의 정을 잊지 못해. 그 연모하는 마음을 안고 봉평장을 거르지 않고 찾아가는 허생원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볍고 빠르게 사랑을 하고, 식어버리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나이 50이 넘어 그 애틋한 마음을 가늠해보고자 하니 내 마음 한구석에도 아려오는 사랑의 통증이 있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걸음도 해깝고, 청청하게 울렸다."
한결 가벼워진 허생원의 마음을 읽는다. 잊지못한 사랑을 찾아 돌아가는 발걸음.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이 삶을 살아온 장돌뱅이가 돌아갈 곳이 생겼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떠도는 마음이 머물 곳을 찾는 것. 자유한 삶을 누군가에게 묶임받길 원하는 것. 반백년을 살아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뭘까? 하룻밤을 연정을 잊지 못해 봉평장을 빠지지 않고 드르게 된 그 마음만큼은 너무나 잘 알것 같다. 잊지 못하는 그 마음만큼은 충분히 알 것 같다. 봉평이 아니라도 충분히 좋았던 선학마을. 봄에 유채꽃이 필 무렵 또 한 번 갈 수 있으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목포의 맛 - 미추리 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