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래서 수술을 하는 걸까, 항암을 하는 걸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한참이 흘렀다. 그리고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소식을 아빠를 통해 들었다. 그동안 언니는 이 병원, 저 병원 알아보며 부단히도 애를 썼던 모양이었다. 그 간절함의 현장에서 배제되어 있어서일까. 내 감정은 마치 제삼자의 감정처럼 이상하리만큼 막연해져 있었다. 그냥, 막연하게 엄마가 살 것 같았고 그 막연함대로 엄마는 살았다.
나는 정말 믿을 수 있는 몇몇 지인들에게만 이 이야기를 했다. 어정쩡한 관계의 사람들이 주는 어쭙잖은 위로가 싫었고, 엄마의 상황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이야기가 되는 게 싫었다. 나의 믿을만한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듣는 본인들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엄마의 폐암 선고 후, 나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엄마의 장례식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장례식을 상상할수록 왠지 세상은 나같이 부정적인 상상을 먼저 하는 불효 막심한 아이를 가녀린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안쓰러움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이없는 발상이지만 그래서 엄마는 당연히 살겠구나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간절함을 담아 기도를 했고, 엄마가 살기를 바랐다. 그 기도 때문일까. 오전에 수술을 받은 엄마는 오후가 되기도 전에 깨어났고 4일 만에 퇴원을 했다. 수술은 큰 암세포가 있는 왼쪽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었고 의사 선생님은 수술 중에 오른쪽 폐의 작은 5개의 세포들에 대해서도 조직을 떼어 검사를 맡기셨다고 했다. 검사 결과 작은 세포들은 암으로 발전하기 전이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될 것이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엄마가 퇴원하기까지 아빠와 나는 돌아가며 병원에서 밤을 보내며 엄마를 간호했다. 엄마는 아빠가 있을 때는 아빠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했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문득, 할머니가 입원했을 때가 생각났다. 당신의 눈에 나는 아직도 횡단보도 하나 혼자 건너지 못하던 어린 손녀라, 간호하러 온 나의 도움은 계속 마다하시고 오히려 나를 편하게 쉬게 하려고 하셨던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은 늘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넘치게 주어졌다. 얼마 남지 않았던 그 시간에, 나를 며칠째 찾는 할머니를 보러 가기보다 친구 만나기 바빴던 나를, 지울 수 없는 이 후회를,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사랑으로 용서하셨을까.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수술을 받고 나서야, 누군가와의 시간에 대해 충분히 만회할 다음이 있다고 믿는 것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멍청이었다. 그렇게 가족과의 시간 앞에 다시는 그런 멍청이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엄마가 퇴원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엄마는 속상해하고 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는 싸움 아닌 싸움은 발발하고 말았다. 그 싸움의 원인은 엄마도 나도 아닌 언니였다. 사실 언니에 대한 모든 것들은 나의 인생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현재 진행형 트라우마였고 부모님에겐 두 딸이 이해되면서도 안타깝고 답답한 꼭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엄마는 수술 후 회복되지 않은 체력에 누군가를 이해할 여유가 없었고 나는 평소와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내 푸념이 나를 도망치듯 집을 나오게 한 사실에 크게 당황했다.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엄마는 속상해하는 말을 내뱉고 나는 그 속상한 말들에 상처를 받고 미안하고 서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끝이 난다. 그리고 그 후에 딸려오는 옵션은 내가 한 달 이상 부모님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싸울 줄도 화해할 줄도 모르는 못 배운 딸의 어쩔 줄 모르는 시간들. 한 친구는 그 일에 대해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이해하고 당연히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어머니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냥 꽃다발 하나 들고 가서 건네주라고 그러면 상황 종료되는거라고 이번 주말에 당장 사가라며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부족한 용기는 타이밍을 보기 좋게 놓쳤고 또다시 그 긴 한 달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