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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16. 엉기사원 보다 라면(feat. 찬물 샤워)

엉기사원

by HuwomanB

엉기사원


엄청난 비포장도로를 다시 달려 엉기사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분과 기력이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오는 내내 우리의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어서였는지 엘사와 침게도 조금 지쳐 보였다. 엘사는 엉기사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면서 안에 박물관도 있고 설명해주는 가이드도 따로 있으니 가 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엉기사원의 가이드가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는 줄 알았다.

엉기사원의 가이드는 사원으로 쓴다는 건물 계단에 선글라스를 쓰고 앉아있었다. 너무 무기력하게 앉아있어서 처음엔 매표소 직원인 줄 알았는데 엘사가 비용을 지불하자 그 상태 그대로 말만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몽골어로. 엘사는 엉기사원 가이드가 하는 말을 통역해주었다. 엉기사원은 라마불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 승려들이 박해를 피해 들어온 곳이라고 한다. 번성했을 때는 1,000명의 승려가 이곳에서 지냈었다고.

가이드는 정말 대충 설명하고 말았고, 엘사는 우리에게 둘러보라고 했다. 박물관이라고 하는 게르 안에도 그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만한 것은 없었다.

유적이라기엔 너무 관리가 되어있지 않았던 엉기사원

사원을 둘러보면서 이전의 번성했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예전 모습으로 복원은 하지 않냐고 묻자 발굴된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서 복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전의 모습을 복원한 모형이나 사진 같은 게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0명의 승려가 생활하고 부처를 형상한 춤을 추고 하던 공간이라면 웅장함과 거대함이 느껴져야 할 것 같았는데 그냥 뒷산 같은 느낌이라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동시에 이 넓은 몽골에서 아무리 국가가 관리를 하고자 한다고 해도 울란바토르에서 3일을 걸려 올 수 있는 이곳에 사람을 보내서 복원을 하고 관광지로 개발을 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길이 포장도로였겠지.

한번 둘러보고 그래도 우리 여기서 사진은 하나 남겨야지 하며 사진을 찍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침게는 아까 먹은 과자를 다시 사주려고 했는데 여기는 팔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니면 이거 다른 거 사줄까?"라고 하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말았고 우린 그냥 괜찮다고 했다.



찬물 샤워


게르는 엉기사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엉기강이 보이는 곳이었다. 이미 많은 차들이 도착해 있었다. 엘사가 그래도 충분히 샤워할 수 있다고 하면서 게다가 여기는 태양열이 아닌 전기를 써서 따뜻한 물도 잘 나올 거라고 했다. 우리는 바로 샤워를 하러 갔고 이미 샤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길에서 예상했던 대로 1등 샤워를 하지 못한 첫 번째 날이었다. 그래도 물은 잘 나온다니까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샤워장에 비어있는 칸이 한 칸 있었는데 나는 게르에 안경을 벗어두고 다시 오려고 언니나 동생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게르에 안경을 두고 다시 나오니 언니가 먼저 들어갔고 동생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가 하나씩 나기 시작했고 동생과 나도 이어서 비어있는 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물을 트니 찬물이 나왔다.


이상하다. 엘사가 여기 따뜻한 물 잘 나온다고 했는데.


수전을 반대로 돌렸지만 물 양만 줄어들 뿐이었다. 물 양이 줄어드는 것을 보니 따뜻한 물이 이쪽에서 나오긴 했었나 보네. 그런데 언니도 동생도 아무 말이 없어서 욜링암에서처럼 내 칸만 물이 떨어진 건가 싶었다. 찬물 샤워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샤워를 했다. 찬물 샤워는 처음엔 차가워도 한번 몸을 적시고 나면 그 시원함에 계속 물을 붓고 싶어 지는 중독성이 있다. 샤워가 다 끝나도 물을 한번 더 끼얹고 싶어 조금 더 물을 적시다가 나왔고 게르로 돌아오니 동생이 "근데 혹시 나만 찬물 나왔어?"라고 물었다. "아니, 나도 찬물이었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고 대답하며 언니에게도 물어보니 언니도 찬물이었다고. 다들 자신의 칸만 그런 줄 알고 조용히 샤워를 하고 나왔던 것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번 게르는 천장을 닫아야 하는 게르여서 나는 천장을 닫으러 나갔다. 그때 엘사가 와서 "이젠 혼자서도 잘하네." 하면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칭찬했다. 아까 오다가 일어난 일들 때문에 기운이 없는 건가. 엘사와 함께 게르에 들어갔고 엘사가 샤워 잘했냐고 묻길래 잘했다고 Literary 시원하다고 했더니 따뜻한 물 안 나오냐고 하며 정말 놀랍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보다 더 찬물 샤워를 싫어하는 엘사였다.

그러고선 아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어제 그 가이드가 길을 모른다고 도와달라고 해서 그런 건데 다음부턴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다. 아까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기분이 나 빠보여서 계속 신경이 쓰였던 듯했다. 길을 알려주느라 속도를 맞춰주는 게 싫었던 것은 아닌데.. 뭐라고 설명하기 복잡해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엘사는 저녁시간을 알려주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


음식 사진을 찍지 못한 두 번째 날이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서 다른 걸 할 생각이 잘 안 났던 것 같다. 저녁은 한국의 칼국수에 양고기가 들어간 맛이었다. 감자와 당근도 들어가 있었는데 고기만큼 감자와 당근도 몽골 요리의 메인 메뉴인 듯했다. 홍고린엘스에서 먹은 미역국에서도 감자와 당근이 있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는 또 그 청년들이 있었는데 배가 고픈데 일행을 기다리느라 못 먹겠다고 침게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침게는 우리에게 자신이 저들의 밥을 도와줬다고 핬다. 처음엔 도와줬다고 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아예 해준 거였다. 아니 그 팀 가이드는 뭘 하는데?

침게는 차라리 저 팀 가이드였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며 저녁을 먹었다. 언니가 더 먹을까 고민하길래 "더 먹어요." 하고 웃으면서 말했는데 침게가 잘못 알아들었는지 "그냥 더 먹게 두지 왜 자꾸 뭐라고 해."라고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내가 한 말이 더 먹으라는 건데 왜 잘못 알아듣고 저러는 거지. 이러면 안 되는 데 정말 삐질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좀 삐졌다. 언니는 더 먹는다고 했고 동생과 나는 먼저 돌아가 쉬기 위해 게르로 돌아왔다.




그래도 라면은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게르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엘사가 라면 끓일 식기구들을 가지고 찾아왔다. 엘사는 바람막이의 모자를 줄을 당겨 모자를 머리에 딱 맞게 조여 쓴 채로 있었는데 동생이 추워서 그러냐 하자 "아니, 여기 흰 파리 많아."라고 했다. 차강소브라가에서도 그렇고 우리보다 벌레를 더 싫어하는 게 확실해 보였다. 엘사는 역시 도시 여자였다.(엘사 몽골사람인데 안경도 씀.) 엘사가 돌아가고 에어배드를 꺼냈다. 홍고린엘스에서보다 바람이 더 많이 불어서 에어배드는 금방 만들어졌다. 물론 홍고린엘스에서부터 이미 구멍이 뚫려 있던 내 에어배드는 내가 그 위에 올라가자마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얼마 안 가 다시 납작해졌다. 다시 부풀리기를 포기하고 그냥 누워서 별을 보다가 우리는 오전에 산 보드카를 마시면서 보자고 했고 내가 만들어오기로 했다. (오전에 장 볼 때 우리는 칭기즈칸 골드 보드카와 담근 체리, 과자를 샀었다.) 체리를 열어서 보드카에 넣으려는데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동생에게 부탁했는데 동생이 뚜껑을 열다가 체리가 담겨있는 국물(?)을 옷과 에어배드에 흘렸다.

아, 이래서 엄마가 어두운 데서 뭐 하지 말라고 한 거구나.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흘려서 닦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바람은 많이 불고 에어배드는 고정이 잘 안되고 생각보다 밖에서 보드카를 마시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다시 게르 안으로 들어와 보드카를 마셨고 담근 체리는 안주라기엔 뭔가 부족해서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밤에 끓인 김치라면, 뒤에 오렌지주스, 보드카, 테이블 위 담근 체리

엘사가 가져다준 버너와 냄비, 식기구를 세팅했다. 얼마나 끓일까 하다가 언니와 동생이 한 입정도 먹을 거라고 해서 2 봉지를 끓이기로 했다. 3명이 한 입만 하겠다고 하면 1 봉지가 아니라 2 봉지가 필요한 게 라면이니까. 진라면과 김치라면 중에 김치라면을 골랐고 김치라면 1 봉지에 물 550ml라고 쓰여 있어서 1.5L 페트병의 3분의 2 정도를 냄비에 넣었다. 냄비가 워낙 크다보니 물은 라면을 겨우 덮을 만큼으로 들어갔는데 그래서인지 물이 더 잘 끓고 스프도 더 잘 배었던 것 같다.

라면이 이렇게 맛있었나. 나는 밖에서 별을 보며 먹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언니와 나는 컵에 라면을 담아 밖으로 나갔다. (동생은 그만 먹겠다고 해서 그냥 별을 보러 밖으로 같이 나왔다.)

'밥 블레스 유'에서 영자 언니가 왜 스키장을 보며 컵에 라면 국물을 담아 마셨는지 이해가 갔다. 게다가 여긴 별까지 쏟아지니.

언니와 내가 라면을 다 먹자마자 바로 들어가려고 하니 동생이 "이 사람들 별 보려고 나온 게 아니라 그냥 라면 먹다가 더워서 나온 거구만!"이라고 하는데 둘 다 부인하지 못했다.



별이 구름에 가리기 시작하고, 하루 종일 많이 피곤했던 우리는 늦게까지 놀기보다는 일찍 자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새벽 3시, 나는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이 이야기는 몽골 번외 1.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날의 진실 에서.)


7월 24일 일정

엉기사원-쳉헤르

-아침 먹고 출발, 가는 길에 점심, 쳉헤르 도착해서 저녁, 온천

옷 코디: 하늘색 티+회색 레깅스+짙은 파란색 긴팔 남방(길이 긴 것)


몽골 17.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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