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반찬은 소시지였다. 몽골 소시지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홍차 한잔만 마셨다.
아침을 먹기 전 화장실에서 만난 침게에게 설사를 계속해서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침게는 "그거 밥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라고 하며 당황했다. 나는 "밥 때문이라는 게 아니라 설사할 때 밥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일단 아침은 안 먹을게요."라고 대답했지만 침게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계속 그래도 밥 먹어야 한다고. 침게는 안되겠다 싶어 엘사에게 설사 때문에 아침을 안 먹겠다고 하자 엘사는 이해하는 듯 알겠다고 했다.
아침을 먹을 시간이 되어 먹진 않아도 같이 앉아있으려고 게르 밖으로 나갔다. 침게는 계속 먹으라고 했고 나는 한국에서 의사 선생님이 설사하면 먹지 말라고 했다고 의사 선생님까지 등장시켰지만 침게는 이해하지 못했다. 먼 길 가려면 먹어야 한다고 차라리 먹고 설사를 계속하라고. 동생이 옆에서 "그래도 별로 먹고 싶지 않대요."라고 거들어준 덕에 다행히 길을 가다가 차를 계속 세워야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쳉헤르로 가는 길 1.
가는 동안 기절하듯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차를 타기 전에 혹시 멀미를 할지도 몰라서 침게에게 멀미약을 받아서 먹었다. 그리고 허리에 핫팩을 대고 차에 탔다. 핫팩을 대고 타니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도 허리가 덜 아픈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가니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멀미약도 듣는 듯하더니 다시 머리가 아팠다. 침게는 아침 안 먹어서 그런 거라고 밥 안 먹으면 멀미약도 소용없다고 했다. 일관성 있다 정말. 그냥 포기하고 우리 과장을 대하는 마음으로 "아 그런 거구나. 이따가 점심은 꼭 먹을게요."라고 했다.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도 설사가 계속되었는데 내가 설사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을 계속 말했음에도 간식 시간에 과장은 나에게 치킨, 복숭아, 아이스크림 등을 먹으라고 권했다. 그냥 먹고 싸면 되지 않냐면서. 하지만 침게는 우리 과장과는 다르게 정말 순수한 마음에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좋게 대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진작 이렇게 생각했으면 어제 침게를 향했던 미움도 생기지 않았으려나.
□ 엘사가 사 준 시원한 주스
엘사가 사 준 주스. 차가 너무 흔들려서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한 마을에 도착해서 차가 잠시 멈추고 엘사는 어딘가 나갔다 오는 듯했다. 돌아온 엘사의 손에는 까만 봉지가 들려있었다. 엘사는 봉지에서 주스를 2개 꺼내 동생과 나에게 주었다. 살얼음이 있는 시원한 주스였다. 동생과 나는 주스를 하나씩 받아 들었고 다음으로 엘사는 콜라 1개를 꺼내 헤라에게 주었고 다시 콜라 2개를 더 꺼내 뒷자리에 있는 침게와 언니에게 주라고 했다. 뒷자리에 있는 언니에게 "언니 콜라랑 주스 중에 뭐 마실래요?"라고 물어보니 언니는 주스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남은 주스는 엘사가 마시려고 하고 있었다.나도 콜라보다는 주스가 더 마시고 싶었어서 언니에게 "언니 그럼 저랑 이거 나눠 마셔요."라고 말했고 콜라 1개를 다시 엘사에게 돌려주었다.
주스는 정말 시원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살얼음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시원한 것을 먹지 못했었다. 아이스박스의 얼음도 첫째 날 다 녹아서 그 안에 맥주를 넣어놔도 조금 냉기가 도는 정도였고 홍차도 커피도 항상 따뜻하게 마셨었다. 동생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계속 생각난다고 했었다. 나도 설사만 아니었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엄청 찾았을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 맞추어 살얼음이 있는 주스라니. 우리는 장을 볼 때 아이스크림만 사 먹었지 이런 걸 찾아볼 생각을 못했는데 알아서 챙겨준 엘사가 너무 고마웠다.
□ 고장 난 클락션, 헤라의 모자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클락션이 멈추지 않고 울렸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리가 가는 길엔 종종 염소들이 길을 차지하고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어서 헤라는 가는 길에 방해되지 않게 동물이 나타나면 늘 클락션을 눌렀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주변에 무슨 동물이 있나 하고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헤라는 차를 멈추고 보닛을 열았다. 클락션이 저절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클락션 소리가 멈추었고 보닛을 닫는 헤라는 나에게 손으로 무언가를 빼는 모습을 취하면서 "끼었어."라고 말했다. 가끔 "빵빵빵빵빵" 소리가 나서 아기 염소가 또 있나 보려고 두리번거리면 아무 동물도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역시 어딘가 끼어있는 클락션이 멋대로 우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번에 완전히 끼어버린 것. 나는 사실 그게 눈이 좋은 헤라가 무언가를 보고 클락션을 눌렀거나 뒤에 따라오는 차에게 무언가 알려주는 신호인 줄 알았었는데..
다시 출발을 하는데 헤라가 자리 근처를 두리번거렸고 엘사가 우리에게 헤라 모자를 못 봤냐고 물었다. 우리는 차 안을 뒤졌지만 없었다. 헤라는 차를 돌려 차를 고치던 곳으로 갔는데 보이지 않았다. 다시 출발하는 듯하더니 얼마 안 가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보러 갔는데 트렁크에도 모자는 없는 듯했다. 나는 이 정도 찾아도 없으니 모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둘러보기를 포기했고 동시에 햇빛도 뜨거운데 이대로 헤라가 운전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헤라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차를 고치던 곳으로 돌아갔고 길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헤라는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모자를 집어 모자에 묻은 흙을 털고 머리에 썼다. 모자 없이 강한 햇빛을 맞으며 운전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꼭 찾으려 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쳉헤르에 도착해서 침게가 해 준 이야기인데 몽골 남자들은 모자가 머리 위에 있는 것이라서 모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도 몸에서 가장 높이 있는 부분이라서 몽골 여자들이 몽골 남자들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면 화를 낸다고. 항상 우리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고 엘사와 침게가 침대에서 잘 수 있게 혼자 차에서 불편한 잠을 청했던 헤라여서 잘 매치가 되지는 않았지만 헤라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 양 떼와 아기 염소들 가는 길에 우리는 초원에 멈췄고, 거기서 볼일을 보고 가기로 했다. 물티슈를 들고 괜찮은 장소를 찾아 헤매다 언덕 같은 곳이 있어 그 뒤에서 볼일을 봤다. 첫 초원 화장실 이용이었다. 배가 조금 아픈 듯하여 큰 볼일을 볼까 했는데 거기까진 무리였다. 내가 차로 돌아가면서 언니와 동생에게 "큰 건 안 나오네."라고 하자 "큰 걸 볼 생각이었어? 대단한데?", "엄청난 자연인이네." 라며 웃었다.
몽골 양들은 얼굴이 까맣고 털이 짧아서 개 같고 아기 염소들은 아기일 때는 털을 깎지 않아서 강아지 같다.
다시 출발하여 가다 보니 한 아이가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엘사가 "저거, 몽골 전통, 양치는 거 봐야 해."라며 내리자고 했다. 차에서 내리니 양 떼와 그 사이에 아기 염소들이 섞여있었다. 몽골의 양들은 얼굴이 까매서'월레스와 그로밋'에 나오는 양들이 생각났다. 또 보통 양 하면 떠오르는 모습처럼 털이 수북하지 않고 짧아서 개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염소들은 아기일 때는 털을 깎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복슬복슬한 것이 강아지 같아서 더 귀여웠다. 어릴 적 에버랜드에서 내 팝콘 봉지를 뜯어먹던 못된 염소가 아니었다. 양은 개 같고 아기 염소는 강아지 같고..
우리가 양 떼를 구경하고 있을 때 엘사는 언니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나도 찍어달라며 하늘이 많이 나오게 찍어달라고 요청했고 엘사는 내 사진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고 정말 허리를 구부려가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처음으로 엘사가 찍어준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 회색인 듯 검은색인 듯 색이 예쁜 염소가 있었는데 침게는 그 염소를 잡고 싶어서 쫒아다니다가 결국 실패했다. 나한테 쟤 예뻐서 잡고 싶은데 계속 도망간다고 하는 모습이 순수한 시골소녀 같아서 좀 귀여웠다. 침게는 나랑 잘 안 맞긴 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인 것 같다.
쳉헤르로 가는 길은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바양작에서 엉기사원을 갈 때는 기분이 안 좋아서 힘들었다면 이 날은 그냥 가는 길이 너무 길어서 힘들었다. 가는 길을 다른 곳들처럼 한 편으로 쓰려고 했지만 작가의 서랍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그냥 떠올리기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서 이러다가 쳉헤르 편은 가는 길부터 울란바토르로 돌아올 때까지 한 편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는데 미리 조금씩 사건들을 적어둔 덕에 분량이 나왔다. 심지어 가는 길은 두 편으로 나눠야 했다. 이래서 계장이 가끔씩 적자생존(적는 자가 살아남는다.)이라고 외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