쳉헤르로 가는 길 2.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다. 침게는 어제 먹은 과자를 갚는다고 하면서 식당 옆의 매점에서 어제와 똑같은 과자를 사주었다. 우리가 어제 전체적으로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침게도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그 6명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로 봐선 포인트는 잘못 잡은 듯했다. 사실 그 포인트는 말하지 않는 한 우리만 알 수 있는 거니까. 먼 타국에서 반가운 마음에 생각 없이 던진 말 몇 마디로 기분이 상했다고 하는 게 몽골 사람들 보기에 더 부끄러운 일인 것 같기도 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는 몽골 사람들의 눈에 도와주기 싫어서 기분이 상한 줄로 오해를 받는 것 자체가 이미 이기적으로 보이고 있었을 테니 무언가를 더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점심
침게가 시켜준 국물요리. 음식이 나올 때까지 침게는 한글로 '신기루'를 반복해서 써보고 있었다. 점심 메뉴는 볶음밥이었는데 침게가 나를 위해 국수를 하나 시켜주었다. 침게는 한국어를 더 공부해야겠다는 것을 느낀다며 "그때 그게 뭐 라그랬지? 싱기..?"라고 물었고 언니가 "신기루!"라고 대답해주었다. 침게는 "그거 어떻게 쓰는 거지?" 라며 종이와 펜을 꺼내서 한글로 썼고 언니와 나는 그거 맞게 고쳐주었다. 침게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신기루'를 반복해서 적었다. 음식이 나왔고 따뜻한 국물을 먹으니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사실 고깃기름으로 만든 국물이라 장에 좋은 편은 아니었겠지만 그냥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어 멀미가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 엘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엘사는 정말 지금까지 중에 가장 신이 난 표정으로 "이게 무슨 소리야? 살아났어!"라고 외치며 전화를 받으며 나갔다. 다시 돌아온 엘사는 우리에게 'Power Volt'가 있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보조배터리를 말하는 것 같아 내 보조배터리를 빌려주었다. 이런 엘사의 표정은 여행 내내 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엘사, 많이 답답했었나 보구나.
□ 침게의 약
점심을 먹고 나서 침게가 설사약이라고 하며 하얀색 약을 주었다. 이 약이 진짜 약이냐고 다시 한번 물어보자 배 아프고 설사할 때 먹는 약이라고 했다. 그럼 어제는 뭐였냐고 하자 어제는 유산균 같은 거였다고.(자세한 이야기는 몽골 번외 1. 차마 말할 수 없었는 그날의 진실 에서) '왜. 왜 진작 약을 주지 않은 거야.' 아마도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밥을 안 먹는다고 하자 심각함을 알았던 것 같다. 어제 약이 아닌 것을 준 것도 있고 조금 의심이 가서 침게가 준 약을 먹을까 언니가 준 지사제를 먹을까 하다가 한번 더 침게를 믿어보기로 했다.
□ 헤라의 장난
출발하기 전까지 쉬고 있으라고 해서 풍경을 보며 식당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헤라는 동생과 나에게 "저기 양 있어. 보러 가."라고 했다. 아까 식당에 들어갈 때 양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그걸 보라는 건가 싶어 양이 있던 쪽으로 갔다. 다른 한국 청년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모두가 몰려들어 볼 정도로 귀여운 양은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동생과 갔더니 양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양이 털이 다 벗겨진 채로 손질되고 있었고 배 안의 내장도 다 빼낸 상태인지 배 부분이 동그랗게 뚫려 있었다. "아악~!" 동생과 나는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고 헤라는 그걸 보며 웃었다.
□ 장 보기
다시 출발했다. 잠깐 마트에 들러 장을 봤는데 우리는 어제 보드카를 마시면서 안주로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던 황도를 샀고, 과자 두 개랑 맥주 각 1캔식 3캔,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샀다. 장을 보고 나오면서 침게가 우리 물 많이 샀으니까 물 걱정하지 말고 마시라고 했다. 어제 다른 팀 차를 고쳐줄 때 우스갯소리로 이 정도면 우리 물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엘사에게 장난을 쳤었는데(그때까진 분위기가 좋았다) 엘사와 침게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걸까.
□ 엘사의 휴대폰
엘사의 휴대폰은 우리의 여행 둘째 날 망가졌다고 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휴대폰 없이 참았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엘사는 가는 내내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페이스북도 하고 노래도 틀었다. 휴대폰이 살아나자 너무 기뻐했던 모습과 계속 휴대폰을 가지고 노는 엘사를 보며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우리가 한국 노래를 틀 때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얼마나 틀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사는 역시 도시 여자다.
그러나 엘사의 휴대폰은 다음날 다시 고장 났다. 엘사는 아무래도 쳉헤르에 휴대폰을 버리고 가야겠다고 했다.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엘사, 휴대폰 안 버리고 가요?"라고 묻자 "하루만 더 가지고 있으려고."라며 장난스럽게 웃던 엘사. 보고 싶다. 엘사의 휴대폰은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울란바토르에 도착해서 다시 켜졌다. 덕분에 우리는 국영 백화점에서와 호텔에서 엘사와 보이스톡을 할 수 있었다.
□ 비
몽골의 옛 수도인 하르허렁을 지날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언덕 같은 곳을 지날 때 엄청 쏟아졌다. 다행히 포장도로로 달리고 있긴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비가 내려서 이러다 사고 나는 것은 아닌가 무서웠다. 그러나 헤라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주변의 말들은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물들은 집이 따로 없고 그냥 울타리 안에서 사는 것 같은데 이렇게 비가 올 땐 괜찮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 지 얼마 가지 않아 비는 언제 내렸냐는 듯 그쳤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도착?
헤라는 길을 가다 멈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쳉헤르가 이쪽이 맞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헤라도 이 근방은 헷갈리나 보구나. 쳉헤르가 가까워질수록 각종 동물들이 한 번에 보였다. 말, 소, 야크, 염소, 양, 다시 말, 소, 야크, 염소, 양... 야크는 소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털이 아래로 늘어져있었다. 거의 도착했나 싶을 때쯤 엘사가 "얘들아 사진 찍고 갈래?"라고 해서 다시 내렸는데 큰 나무가 있었다. (사실 엘사는 길을 가다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늘 사진 찍고 갈래? 하고 묻는 것 같다. 하지만 어디에서 내리든 하늘은 파랗고 초원은 푸르러서 찍는 곳마다 화보가 된다.) 큰 나무가 혼자 서 있는 게 조금 몽환적이어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언니가 괜찮은 구도를 잡아주었고 잘 나올 때까지 계속 위치를 바꿔가며 찍어주었다.
도착!
드디어 도착. 오전 8시 30분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12시간, 이제까지 중 가장 긴 이동시간이었다. 쳉헤르의 숙소는 게르도 있고 리조트도 있었는데 우리가 묵을 곳은 리조트였다.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더블침대! 우와, 안에 화장실이랑 샤워시설도 있어!"
쳉헤르에 있는 숙소는 게르가 아닌 리조트였다. 더블배드 두개. 침대와 화장실이 있는 방이라니! 동생이 들어오면서 화장실 물은 유황온천물이라 그 물로 양치를 하지 말고 마실 물로 하라고 했다고 전해줬다. 이쯤 되니 동생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잘 들어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욜링암과 홍고린엘스에서 식사메뉴를 미리 알아오기도 하고. 물론 이제까지의 일정이나 주의사항 등의 정보전달이 우리가 다 있을 때 공지가 되는 것이 아닌 엘사나 침게가 지나가다가 만나는 사람에게 말하고 그 내용을 들은 사람이 전체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흘러오긴 했지만 유독 동생이 정보를 잘 들어왔던 것 같다. 동생이 착해서 그런가.
TMI: 나는 표정도 잘 안 짓고 가끔 상대방의 속마음을 평가하려는 듯한 눈빛을 할 때가 있어서 엘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침게는 그런 나를 좀 불편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부터 그런 성향이었던 것은 아닌데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점점 기본 표정 세팅이 변했던 것 같다. 이 직업이 업체에게 얕보이면 안 된다는 자기 최면이 필요한 직업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선한 인상을 스스로 많이 죽였다. 그렇게 변해가는 나 자신이 무서워서 요새는 다시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참 쉽지 않다.
저녁은 김치찌개라고 했다. 숙소에서 쉬고 있었는데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커튼을 열어보니 침게가 우리가 들어와 있는 건물 옆의 동그란 건물을 가리키더니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몽골 19.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