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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15. 길에 갇히고 마음은 닫히고

바양작-엉기사원

by HuwomanB

길에 갇히다: 몽골의 정 4.


우리는 바양작에서 출발하여 엉기사원으로 향했다. 한참을 가던 중 헤라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엘사는 아침에 우리를 따라오던 차가 고장이 났는데 헤라한테 장비가 있어서 가는 길에 주려고 한다고 했다.

그 팀의 차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길에 한국 청년들이 나와있었고 그 팀 기사는 차를 고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년들은 우리 차에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고 얼마 안 걸릴 것으로 생각해서 마침 오랜 이동에 허리가 아프기도 했고 조금 걷기로 했다. 장비만 주는 거면 얼마 안 걸릴 테니 길을 걸어가다 보면 데리러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엘사에게 우리 셋 사진을 뒤에서 찍어달라고 부탁하며 내 핸드폰을 주고 앞으로 걸어갔다. 엘사는 사진을 찍어주며 "잘 가~내년에 만나~"라며 장난을 쳤다.

한참을 걸어가니 더워지기도 하고 너무 멀어진 것 같아 다시 천천히 걸어서 차로 돌아갔는데 그 팀 차는 아직도 수리 중이었고 헤라는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장비만 전해주는 게 아니었나 보네.


엘사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하자 거의 다 됐다고 했다. 1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기다리다 지쳐 그냥 땅바닥에 앉았다. 엘사가 돗자리를 가져왔다. "우리 여기서 기다리자. 얼마 안 남았어." 차 쪽을 보니 이젠 아예 헤라가 차를 고쳐주고 있었다. 아니 왜? 헤라는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운전도 하고 남의 차고 고쳐주고 너무 고생인데.. 우리는 엘사에게 "이 정도면 저 팀이 우리한테 물이라도 줘야되는거 아니에요?"라고 웃으며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기분이 좋았고 그냥 역시 몽골의 정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차는 다 고쳐졌고 우리가 다시 우리 차로 들어가는데 침게는 그 팀 청년들과 많이 친해져 있었다.

그중 한 여자아이가 "언니, 우리 어차피 같은 숙소니까 저도 내일 머리 따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차에 타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기다려줘서 고맙다거나 잘 가라거나 하는 인사를 하지도 않았고 우리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닫히다 1.그 아이들

침게는 그 팀이 너무 좋았는지 그 팀 이야기를 계속했다. "쟤네는 대학생들이고 6명이서 왔대. 너네처럼 원래 모르는 사이인데 몽골 오려고 만났대. 근에 우리 3명이라니까 '어 이상하다 보통 6명이서 가는데 부자인가 보다. 부자!'라고 하더라." 그 이야기까지는 그냥 귀여운 어린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하, 그래요? 뭐 우린 돈 버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언니는 "근데 걔네가 돈 더 많을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사실 그럴 것 같기도. 우리가 웃으니 침게는 더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 대학 졸업했잖아? 그래서 내가 우리 애들은 대학생 아니라고 했더니 '어 그럼 밥사달라 그래야겠다!' 고 그랬어.


침게는 재미있다고 하는 이야기였겠지만 우리는(특히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직장인이고 돈도 많은 것 같으니 밥 사달라고 해야겠다니. 친해지고 싶어서 뱉은 말이라면 차에 탈 때 인사라도 하든가. 순간 분위기가 차가워졌고 아무도 침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엘사와 침게가 잠시 내렸을 때 동생이 말을 꺼냈다.


"아까 걔네가 '우리 가이드 이 사람들이랑 바꾸고 싶다.'라고 하더라."


밥 사달라고 해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더 별로였다. 그 팀 가이드가 그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말해도 되나 싶었고 정말 그 가이드가 별로라서 그러는 거였다면 더 이기적인 생각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헤라는 계속 중간중간 그 팀이 따라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고, 가끔 중간에서 360도를 돌면서 그 차가 잘 따라오나 확인해주는 것이었다.(처음 출발할 땐 그게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인 줄 알았다.) 조금 더 가다가 헤라는 다시 멈췄고 그 팀의 기사도 차를 세우고 보닛을 열었다. 헤라가 그 팀 차의 보닛을 여는 것까지 봐주는 걸 보고 나는 "참 손이 많이 가네.."라고 중얼거렸고 언니도 "보닛 여는 것까지 봐줘야 해?"라고 이야기했다. 엘사는 우리가 기분이 나쁜 걸 알았는지 "얘들아 미안한데, 우리 오늘만 참자. 내일부터는 내가 이렇게 못하게 막을 거야."라고 이야기했고 우리는 알겠다고 했다. 갈 길은 멀고 이동시간은 계속 늘어나는데 기분이 안 좋으니 허리도 더 아파오고 멀미도 심해졌다. 나는 나만 예민하게 생각하고 기분이 나쁜 건가 했는데 게르에서 이야기해보니 다들 그 아이들의 말이 거슬렸고 그들의 태도에 기분 나빠하는 자신이 꼰대인가 하는 생각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마음이 닫히다 2.침게


그렇게 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침게가 우리가 장을 본 봉지를 뒤지기 시작했고, 술안주를 하려고 딱 한 봉지를 샀던 그 과자봉지를 꺼냈다.

"너네 이거 칩스 안 먹어? 우리 배고프니까 이거 먹자."

"그거 이따가 술안주 할 거예요."

"그럼 내가 이따 똑같은 거 사줄게. 먹자."

우리도 과자를 먹고 싶었다면 그러자고 했겠지만 그때 우린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그러자고 하지 않았다. 사실 어제도 침게가 차 안에서 우리 봉지를 뒤지더니 너네 이거 과자 안 먹냐고 묻길래 이따 밤에 맥주랑 먹을 거라고 하니 시무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었다. 그런데 오늘 침게는 과자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나 보다. 침게는 언니한테 음식 얘기를 계속하더니 "배고파서 음식 얘기만 하게 된다."는 말과 함께 다시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더니 "우리 지금 배고프니까 이거 칩스 먹자. 내가 이따가 똑같은 거 사줄게."라고 한번 더 말했다.

배고픈 건 우리가 아니라 침게 혼자였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무시할 수 없어서 그러라고 했고 침게는 과자를 뜯었다. 그러고서 언니와 동생, 그리고 나에게 먹으라고 봉지를 내밀었고 나는 멀미가 나지만 예의상 조금 집어서 맛만 봤다. 그 후 혼자 계속 먹기 민망했는지 다시 봉지를 내밀었는데 멀미가 계속 나서 안 먹겠다고 했다. 침게는 엘사에게도 "언니! 칩스!"라며 과자를 건넸는데 엘사도 조금 집어 먹고 말았다.

엉기사원(몽골 16.)에 도착해서 둘러보고 난 뒤 침게는 "아까 먹은 거 다시 사주려고 했는데 여기는 그런 종류 안 판대."라고 말했다. 많이 있던 것 중 하나도 아니고 딱 한 봉지 안주를 하려고 산 것을 먹어놓고 여기는 과자 종류 안 판다고 하는 모습에 조금 황당했다. 나는 침게가 들리게 "아 그럼 우리 이따 술이랑 뭐 먹지."라고 말했고 침게는 "너네 라면 있잖아, 라면 끓여서 먹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침게와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졌고 "아니면 이런 건 어때? 빵 같은 거로 사줄까." 라며 다른 걸 이야기하는 침게에게 그냥 없어도 괜찮다고 라면 끓여 먹으면 될 것 같다고 하고 게르로 가는 차에 탔다.



나는 쪼잔한 자본주의자인 걸까.


가이드들의 간식은 가이드들이 우리가 낸 투어비를 쓰면서 사는 듯했다. 그래서 엘사는 마트에서 과자를 사서 나눠주기도 하고 음료수를 따로 사주기도 했다. 우리도 우리 간식을 당연히 함께 나눠먹었지만 침게는 우리가 먹을 생각이 없을 때에도 우리 봉지를 열려고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쳉헤르에서는 엘사가 주의를 준 것인지 침게는 우리가 점심때 같이 먹으려고 들고 간 보드카를 보고 너네가 주면 먹을게 라고 말했는데 한편으론 변한 침게가 어색했지만 한편으론 메인 가이드하려면 변하긴 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몽골 16.)을 먹는데 그 아이들이 또 있었고 침게가 그 아이들의 밥을 해줬다고 했다. 아니 그 팀 가이드는 뭘 하는데? 그 팀 인원이 많아서 가이드 혼자 밥을 하기 힘들 거 같기도 하고 애들이 너무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어서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 아이들은 철이 없는 건지 순수한 건지, 아님 내가 너무 비뚤게 생각하는 건지, 다시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3명이라 인당 더 많은 가이드비를 지불했고, 그에 대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저 팀은 그런 우리의 혜택을 거저 가져가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침게가 그 팀을 챙기는 것 역시 우리가 지불한 금액에 대한 대가를 다른 팀에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원이 적은 장점은 차를 넓게 쓸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장점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누구 때문이던가. 여행사는 우리에게 미리 허락을 구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지금 예정에 없던 침게의 경비를 내고 있는 것이 누구던가. 그게 아니었으면 엘사는 우리의 점심으로 더 다양한 가격대의 메뉴를 주문해주고 우리에게 더 많은 간식을 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따지면 사실 침게는 시끌벅적한 팀이 좋다고 저 팀을 챙길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임무가 있으니 우리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도 길에서 기다릴 때도 엘사는 우리에게 돗자리를 펴 주었는데 침게는 우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 팀과 이야기하면서 그 팀을 더 챙기고 있었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될수록 내가 계속 사람을 낸 돈에 대한 대가로 보는 속물인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이 또한 정해진 예산을 가지고 공사장에서 업체와 씨름하던 버릇이 만들어낸 못된 마음인 걸까.


하지만 라면을 끓일 도구들도 침게가 아닌 엘사가 챙겨주는 걸 보고 침게는 본인의 역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왜 우리를 따라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허리는 아프고 멀미는 심해지고 기분은 더더욱 꼬여갔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도착한 엉기사원은 유적이라기보단 그냥 폐허 같았다.


몽골 16.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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