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씻을 것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나왔고 엘사는 우리를 데리고 샤워실로 갔다. 샤워실은 총 4개의 칸으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은 없었다. 엘사가 각 칸의 물을 다 틀어보면서 물이 나오는지 확인했고 1,2,3번 칸은 물이 나오고 4번 칸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 동생, 언니 순으로 1,2,3번 칸에 들어갔고 엘사는 "자, 이제 됐지?"라고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다.
물은 첫날보다 더 조금 나오는 듯했다. 물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고 물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감을 때도 몸을 씻을 때도 비누를 묻힐 때에는 잠시 물을 잠가뒀다. 그런데 몸에 비누칠을 한 후 물을 다시 틀려고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 동생아, 너 있는 데는 물 나와?"
"응. 언니 안 나와?"
"어. 나 물 끊겼나 봐. 너 끝났으면 거기로 옮겨도 돼?"
"응, 나 방금 나왔어. 들어가."
나는 황급히 옆 칸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밖에 따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던 듯했다. 만약 물이 끊겼을 때, 옆칸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서 비누를 대충 수건으로 닦고 다시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거나 내 칸의 물이 끊긴 것에 대해 기다리던 누군가에게 원망의 말을 들었다면 그 날이 많이 괴로울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 여행은 순조로운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악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살 길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환경이든.
저녁
이 날은 음식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침게가 어제의 점심에도 먹었고 오늘의 점심에도 먹었던 밀가루 면을 해줬다. 저녁을 먹으러 엘사와 침게가 있는 게르로 가기 전에 동생이 오늘 메뉴 미리 물어봤다면서 "침게가 좋아하는 그 면요리래."라고 했을 때부터 속이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면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 나에게 이틀간 3번의 밀가루 면은 많이 힘들었다. 게다가 침게는 손이 컸다. 3인분 같은 1인분을 각각의 그릇에 덜어 나눠주었는데 처음에 충격에 휩싸여 일단 먹어치우자는 생각으로 먹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미리 덜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헤라, 엘사, 침게는 먼저 다 먹고 잠시 게르를 나갔고 동생과 나는 더이상 못 먹겠는 것을 꾸역꾸역 먹다가 결국 남기기로 했다.
"식당에서 사 먹는 거면 남기는 데 가책이 덜한데, 눈 앞에서 직접 해준 걸 남기려니까 너무 미안하다."
"그러게 처음에 받을 때 미리 덜을걸, 그땐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미안하긴 했지만, 한계였다. 더 먹으면 정말 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나는 남긴 것을 한 그릇에 모았고, 그릇을 정리하는 데 엘사가 들어왔다.
"누가 이렇게 남겼어?"
"저랑 동생이요, 맛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요. 미안해요."
엘사는 알겠다고 했고 우리는 우리 게르로 돌아갔다. 나는 속이 계속 더부룩해서 한국에서 챙겨 온 소화제를 먹었다. 그 후 밤이 되니 괜찮아져서 언제 속이 안 좋았냐는 듯 오전에 산 맥주와 보드카를 마실 수 있었다.
고슴도치 습격사건
밥을 먹고 게르에서 쉬고 있는데 엘사가 신이 난 듯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가득한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우리를 다급히 불렀다. "얘들아, 이리 와봐, 빨리빨리!" 우리는 엘사의 게르로 달려갔는데 게르 안에서 고슴도치가 과자를 먹고 있었다. 먹던 과자를 다 먹자 침게가 또 다른 과자를 한 조각 던져주었더니 다시 그 과자를 정말 야무지게 베어 먹었다. "이 게르에 사는 애인가 봐, 침대 밑에 있었어." 가이드들에게도 신기한 광경이었는지 다른 팀 가이드들도 구경하러 오고 근처에 있던 한국 청년들도 구경하러 왔다.
그런데 헤라는 그 고슴도치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와서 고슴도치를 잡으려고 했다. 고슴도치는 게르 천막 안쪽으로 도망쳤는데 결국 잡혔고 헤라가 들고 가다가 한번 놓쳐서 쓰레기통 아래로 들어가 있는 것을 다시 쓸어 담아 더 먼 자연으로 보내주었다.
과자를 야무지게 먹는 거로 봐서는 이미 사람의 손을 탄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게르 캠프에서 유명한 고슴도치였다고.
중간에 떨어져서 쓰레기통 아래로 숨은 고슴도치. 그 고슴도치를 다시 쓸어담는 헤라.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보드카(오전 장보기)
오늘 오전,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들었었다. 우리는 어제 사지 않아서 아쉬웠던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사기로 했다. 칭기즈칸 골드를 사려고 하는데 큰 병밖에 없어서 고민하던 중 침게가 "그거도 맛있긴 한데, 그 아래 있는 거 그게 진짜 좋아. 몸에도 좋고, 다음날 머리도 안 아파." 용량도 적은 것이 있고 또 술은 잘 마시는 사람 말을 들어야 한다고 일단 오늘은 침게가 추천해준 보드카를 사기로 했다. 그리고 오렌지주스와 어제 3캔만 사서 아쉬웠던 맥주를 각자 2캔씩 6캔을 샀다.
침게가 추천해 준 보드카. 맥주와 보드카를 차려놓고 마셨던 모습.
물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판단이 서지 않아서 침게에게 "우리 물 필요할까요?" 하고 물으니 "어제 너네 작은 거 2묶음 샀잖아, 엘사도 큰 거 2 통하고 작은 거 1묶음 샀었는데 다 마시고 우리 이제 작은 거 1묶음밖에 안 남았어." 이 날이 바로 물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날이었다. 차에서 우리 물을 선심 쓰듯 헤라와 엘사에게 주고, 한 병을 다 안 마셨는데 자꾸 새 병을 꺼내던 침게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아. 가이드가 사는 물은 요리용만 사는 거로 한 건가. 침게가 어제 엘사에게 한 말이 그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나간 일, 물이 모자라면 곤란하니 일단 1묶음을 더 사기로 했다. 그리고 소심한 반항으로 '게르에 오늘 산 물 1묶음 꼭 다 가져다 놔야지.' 하고 혼자 다짐했었다. 게르에 도착할 때쯤엔 까먹고 그냥 각자 먹던 작은 물병 하나씩만 들고 와버렸지만. 내 쪼잔함은 생각에서 그쳐서 더 쪼잔해지는 것 같다.
저녁을 먹고 고슴도치도 보고 나니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고 비가 조금씩 떨어졌다. "오늘은 별 못 보겠다. 안에서 놀자." 이제 오전에 장본 것들을 펼칠 시간이었다.
엘사의 노래
게르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와 보드카를 마셨다. 첫날에는 별을 보느라 서로 이야기를 많이 못해서 아쉬웠는데 날씨 덕에 이렇게 게르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을 되어서 이 또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하게 어색했던 사이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맥주를 먼저 다 마시고 보드카를 한 잔 정도 따랐을 때쯤, 엘사가 우리 게르로 들어왔다. 우리는 엘사에게 와서 보드카 한 잔 하라며 보드카를 따라주었는데, 동생이 오렌지주스랑 섞어주냐고 하자 섞지 말라고 했다. 엘사는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각각 다른 컵에 따른 뒤에 보드카를 먼저 마시고 이어서 오렌지주스를 마셨다.우리는 보드카 맛을 몰라서 오렌지주스에 타서 알코올 향이 나는 어른주스맛으로 먹는데 엘사는 향을 따로 느끼는 것 같았다. 역시 몽골사람이었다.
엘사는 오늘 괜찮았냐고 물었고 우리는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다. 이때가 내가 엘사에게 몽골사람들은 다 말을 잘 타냐고 물었고 엘사는 몽골 사람들에게는 말 잘 타는 피가 흐른다고 이야기해줬던 때다.
엘사는 갑자기 몽골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하고, 어디 갈 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도 한 곡 불러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좋다고 듣고 싶다고 했고, 엘사는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듯하더니 처음 우리가 출발할 때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 좀 걱정했어. 조용하고, 말도 별로 없고 해서 이 애들이 끝까지 잘 갈 수 있을까 걱정했어. 근데 처음 밥 먹는 거 보고 안심했어. 이 애들은 끝까지 가겠구나 했어. 사람들 오면 첫 식사 어떻게 하는지 보면 알 수 있어. 첫 식사 다 잘 비우는 팀은 끝까지 가."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많이 웃었다. 보통 몽골 여행을 오는 대학생들은 아마도 시끌벅적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이동시간을 채우는 것 같았다. 반면에 우리는 떠들기보단 창밖을 감상하고 노래를 부르기보단 듣는 성향들이니 엘사는 우리가 말이 없으니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성격인지 파악하기도 힘들고 또 한편으로는 얘네가 사이가 안 좋은가 하는 걱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첫 식사를 다 비우는 것을 보고 안심을 했다니. 뭔가 웃기면서도 민망했다.
그러고 나서 엘사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를 못 알아들으니 무슨 내용인지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멜로디가 몽골의 넓은 초원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고 어딘가 한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에 대한 노래라고 했는데 초원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래가 끝나고 우리는 박수를 쳤다. 엘사는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엘사는 가이드를 하기 전에는 공무원이었는데 소방서에서 office 업무를 맡았다고 했다. 보통 몽골 여자들은 15년 정도 일하면 그만둘 수 있는데 자기는 아는 사람이 도와주어서 8년 만에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더 오래 일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공무원의 장점이 정년보장인 것인데 몽골은 일에 대한 개념이 좀 다른 걸까.
엘사는 일을 그만둔 뒤에 무작정 터키로 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 무얼 할까 하다가 공무원일을 하면서 한국도 가고 통역도 했던 경험을 살려서, 요리는 여자이기에 어느정도 할 수 있으니 가이드를 하자고 마음먹었고 가이드 일을 한 지는 1년이 채 안되었다고 했다. 굉장히 능숙하고 든든해서 경력이 많은 줄 알았는데 1년이 안되었다는 사실에 나도 놀랐고 언니와 동생도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엘사는 지금은 군인 쪽에서 일하고 싶어서 몇 군데 원서를 넣었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고 했는데 순간 엘사가 더 멋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엘사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자부하지 못하는데.
조금 있으니 침게가 들어왔다. "언니, 찾았잖아! 사라진 줄 알았잖아!" 하며. 침게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우리는 침게에게도 보드카를 주었고 침게도 엘사처럼 섞어마시지 않는 것을 보고 역시 몽골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침게는 원래 이 여행의 일원이 아니었는데 이 여행사는 처음 들어온 가이드는 무조건 한 번은 무급으로 도우미 가이드를 해야 해서 우리 팀에 합류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게르에 자기 침대가 없어서 바닥에서 자야 할 것 같다고 슬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침대가 하나 남으니 여기서 자도 된다고 했지만, 엘사는 극구 부인하며 침게를 데려갔다.
"나랑 같이 자면 된다니까 왜 그래, 침대 넓어, 우리 둘이 같이 자면 돼."
이 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 이 글을 정리하며 생각해보니 엘사의 이 말속에 여행 내내 엘사와 침게가 보여줬던 모든 모습들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엘사와 침게가 나간 뒤에도 우리는 더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 연애, 회사... 다들 위로 형제가 있다 보니 통하는 것이 많았고, 여자로서 사회에서 겪는 일들 또한 비슷해서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7월 22일 새벽 1시 30분, 이제 자자. 그새 침대에는 3마리의 풍뎅이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무 느낌 없이 침대보를 툭툭 털고 그 위에 베개를 다시 올려놓았다. 게르 안 풍뎅이를 없애겠다고 난리를 치기엔 이미 너무 많았다. 다들 그러려니하는 듯했다. 불을 끄고 동생의 "다들 잘 자요."라는 인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내일은 은하수를 볼 수 있길 바라면서.
※침게가 추천해줬던 보드카는 정말 몸에 좋은 건지 술이 조금만 들어가도 얼굴이 빨개지는 내가 끝까지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고, 다음날 머리도 아프지 않았다.
홍고린엘스로 가는 길은 모든 길이 다 비포장도로였다.
7월 22일 일정
욜링암-홍고린엘스
-아침 먹고 출발, 이동 중 점심, 홍고린엘스 도착, 낙타 타기, 사막 오르기, 사막 썰매, 게르에서 저녁